삶은 순간이면서 영원하다. 이별할 줄 알면서도 우리는 왜 시작하는가.
삶은 순간이면서 영원하다. 이별을 겪으면 시작과 끝의 경계가 모호해지곤 한다. 이별했다. 항상 무언가로부터 떠나온다. 떠날 것을 알면서 떠나온다. 다음날 아침. 아무렇지도 않게 꽂혀있는 칫솔에 감정이 실린다. 이미 출항한지 오래. 배는 미련만 남기고 사라졌다. 편의점에서 3000원도 안주고 산 칫솔이 날 미련하게까지 한다. 사람은 3차원 공간에 살고 있다. 하여 3차원의 사물을 인식할 수 없다. 인간의 눈은 평면밖에 보지 못하며 그렇게 태어났다. 그런 우리가 사과를 보고 입체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상상력과 시간 덕분이다. 시간을 들여 사과 뒤로 이동해보면 사과의 뒷면과 곡률을 이해할 수 있고 상상력을 통해 다음에도 사과를 보면 구형의 모양을 떠올릴 수 있다.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르는 법.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초능력에 때로는 고통이 따른다. 공간은 시간을 담는다. 인간은 특별한 계기를 통해 공간의 역사를 그릴 수 있다. 마치 4차원 세계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칫솔. 실수로 버리지 못한, 별거 아닌 칫솔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텅 빈 자취방에 한 사람이 더 보인다. 그 사람이 있던 모든 순간들이 겹쳐 보인다. 이로써 그 혹은 그녀는 한 사람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다. 사람들은 요리를 하고 있다. 누구는 식기를 닦고 있고 누구는 고기를 굽는다. 동시에 누군가는 선반위에 둔 과자를 꺼내 먹으며 주방에 놓인 쓰레기를 비운다. 누군가는 공부를 하고 있으며 누군가는 애정행각을 벌인다. 갈 준비를 하는 사람과 잘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서로 교차한다. 시끄럽다. 오랜만에 집이 요란하다. 이윽고 침대 옆에서 머리를 말리는 소리가 들린다. 바이올린이다. 평소에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릴 땐 소음이기만 했던 드라이기가 이제 바이올린 같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거울 앞, 침대 위 여러 곳에서 울리는 드라이기 소리는 마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연상케 한다. 세탁기 돌리는 소리는 베이스, 집 안에서 주고받았던 모든 대화들은 애절한 노랫소리가 되어 어우러진다. 울고 웃었던 시간들은 노래의 하이라이트를 구성했으리라.
첫 장면이 보인다. 노트북을 보고 있는 한 남자. 노트북으로 노트북(영화)를 보고 있는 남자. 언어유희처럼 아이러니하다. 로맨스 영화를 보고 몽글해진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2시간 뒤로 영화약속을 잡는다. 시간이 없다. 부리나케 옷을 입는 그가 보인다. 향수를 고민한다. 시간이 교차한다. 그녀가 골라준 향수를 들고 집에 왔던 그가 스스로에게 향수를 건넨다. 향수를 뿌린다. 음악에서 향이 난다. 가장 자연스럽고 예쁜 옷을 골라야 했다. 본가가 그와 가까웠던 여자는 그가 본가에서 2시간 거리의 자취방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장 멋진 옷이지만 방금 집에서 나온 것처럼 자연스러워야 했다. 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다. 현재의 나는 의자에 앉아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들뜬 모습. 모든 출발을 함께한 문을 통해 그는 이제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려한다. 서둘러 집을 나서는 뒷모습이 보인다. 문이 닫혔지만 다시 문이 열린다. 이는 시작을 의미했다. 들어온 남자는 전화기를 들고 책상에 앉는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행복해 보인다. 보고 있는 나의 입가에 미소가 진다.
하지만 동시에 그 남자와 등진 한 남자는 전화기를 붙들고 울고 있다. 처음과 끝을 함께 본다는 게 얼마나 마음 아픈가. 행복한 남자 뒤로 아침, 헝클어진 머리를 쥐어짜며 슬퍼하는 한 남자가 있다. 노트북은 꺼져있다. 일어난 지 얼마 안됐기 때문이다. 몽글하지도 않다. 영화가 끝나가기 때문이다. 새로운 약속을 한다. 헤어지기로. 시간이 없다. 남은 시간이 없다. 서로의 가슴에 상처가 생겼기에.. 전화를 끊고 나갈 준비를 한다. 공간에서 그녀를 덜어내기 위해서였다. 제대로 씻지 못하는 그가 보인다. 웃음소리와 나머지 추억이 얽힌 소리들에 아직 이곳은 파티장 같다. 파티장에서 우는 남자를 평소에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가 기억을 정리한다. 흰 봉투에 기억들을 쑤셔 넣는다. 급하다. 모든 게 급해졌다. 웃음과 사랑이 가득한 공간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만 같다. 신발을 신는다. 꾸겨 신는다. 3달 전에 집을 나서는 그와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급한 건 3달 전의 그였지만 흰 봉투와 옷가지들을 잔뜩 든 그는 여유가 없어 보인다. 절박하다. 공간의 소음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다. 뛰쳐나간다. 문을 여는데 닫는 것 같다. 나가는 뒷모습은 애처롭다. 이렇게 영화는 끝났다. 집에 돌아온 그는 노트북을 킨다. 끊임없이 재생되는 공간의 추억들을 뒤로하고 헤드폰을 쓴다. 그렇게 나는 아직 그 공간에 살고 있다.
삶은 순간이면서 영원하다. 하나의 공간은 많은 기억을 품고 있는 하드디스크 같다. 기억하는 한 우리는 삶 전체를 순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가끔 눈앞에 현재 공간에서 있었던 과거의 일들이 보이곤 한다. 5차원의 존재는 나의 처음과 끝을 같이 보고 있을까. 지금 이 시간에도 미래의 나와 과거의 나는 같은 공간에서 울고 웃고 있을까. 우리는 스스로가 언젠가 떠날 것을 안다. 그럼에도 삶을 사는 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인생은 이미 다 정해져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직접 걷지 않는 이상 결말을 알 수 없다. 슬퍼하고 기뻐하며 다시 살아가 보려한다. 그럼으로써 삶을 창조해보려 한다. 같은 영화를 봐도 평이 갈린다. 정해진 삶을 삶으로서 나만의 평을 내린다. 삶으로서 삶을 창조하는 것. 그렇기에 이별을 알면서도 최선의 이별을 준비하는 것. 그것이 인생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