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과 미움의 사이에서
내가 중학교 3학년, 그러니까 16살쯤이 되었을 때는 엄마에게 집적거리는 옆집 아저씨로부터 엄마를 지킬 수 있었다. 엄마도 내가 그 정도의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까지 한 4~5년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14살쯤 어느날, 하교를 하고 집에 온 나는 울고 있는 엄마와 마주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엄마의 손에는 종이가 들려있었고 나는 나중에 몰래 그 종이를 꺼내보았다. 그리고 그 종이는 아빠의 재혼을 알 수 있는 서류였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주민등록등본? 가족관계증명서? 그런 종류였던 것 같다. 엄마가 그 서류를 어떻게 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충격적이었던 건 나와 엄마를 버린 아빠가 다른 여자와 재혼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난 그날부터 아빠에 대한 그리움보다 원망과 증오만 남았던 것 같다.
엄마는 원망의 눈빛을 담아 나를 보며 말했었다.
"넌 네 아빠랑 꼭 닮았어."
"널 보면 자꾸 네 아빠가 생각나."
아빠를 닮았다는 말이 너무 싫었다. 엄마가 미워하는 아빠를 닮은 나를 엄마가 버릴까 봐 불안했다. 나의 불안증은 그때부터 심해졌던 것 같다. 어느 상담센터에서 나의 병명을 이렇게 말했다.
유기 불안. 엄마마저 날 버리고 갈까봐 난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 버릇과 습관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이제는 엄마가 날 버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아직도 엄마의 눈치를 본다. 그리고 요즘도 가끔 엄마는 나에게 아빠를 닮았다는 말을 한다. 난 세상에서 아빠를 닮았다는 말이 가장 싫다. 아빠처럼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반대로 살기 위해 애쎴다.
"네 아빠는 애가 없으니까 재혼을 했지."
엄마의 이 말은 나 때문에 엄마가 재혼을 못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리고 그게 현실이기도 했다. 그 당시 애 딸린 이혼녀가 재혼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자책이 심한 걸까. 엄마가 나 때문에 불행해졌다고 생각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슨 생각들의 끝은 늘 아빠에 대한 원망이었다.
"이 모든 게 아빠 때문이야. 아빠가 날 버리고 가서 이렇게 된 거야. 아니, 아빠 사업이 망해서 이렇게 된 거야."
내 인생이 이렇게 된 원인을 모두 아빠에게 돌렸다. 그렇게 아빠라도 원망해야 살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빠도, 엄마도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 좀 찾아주세요."
"이 사람이 누군데?"
"아빠요. 주민등록번호로 찾을 수 있어요?"
경찰관은 웃으며 안된다고 했다. 아빠라도 개인 정보는 알려줄 수 없다고. 난 아빠를 찾아서 묻고 싶었다. 왜 엄마와 날 버리고 가서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까지 했냐고.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아냐고. 엄마가 얼마나 날 힘들게 온힘을 다해 키웠는지 아냐고. 그래도 엄마 덕분에 잘 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날 키운 건 엄마라고. 당신은 내 아빠 아니라고, 꼭 말해주고 싶었는데 아빠를 찾을 방법이 없었다.
"여보세요."
"......."
"누구세요?"
"......아빠야."
8년 만에 듣는 아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빠라는 소리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어색한 몇 분 간의 통화 후 며칠 뒤에 8년 만에 아빠와 마주할 수 있었다.
아빠와 카페에 마주앉아 처음 든 생각은 '날 버리고 갔으면 잘 살기나 하지.' 였다. 내 기억 속, 그리고 사진 속의 아빠가 아니었다. 다시 만난 아빠는 늙고 작고 초라했다.
아빠와의 재회 이후 난 알 수 있었다. '가난'과 '빚'이라는 늪에서 우리 세 가족은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차라리 아빠를 찾지 말 걸 생각도 했다.
아빠에게 오열하며 원망을 쏟아냈던 어느 날, 난 주저앉아 울었다. 전화기 너머 아빠도 많이 우셨다.
아빠는 요즘도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하신다.
이제 20년이 훌쩍 넘은 일이고, 웃으며 아빠와 소주 한 잔도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아빠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아빠에게 받은 상처는 아물어 흉터가 되었지만, 한번씩 내 과거를 돌아볼 때면 아직도 흉터가 저릿하다.
이제는 늙어버린 아빠를 보며, 그래도 버티고 살아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젠 내가 엄마,아빠에게 미안해졌다.
보란 듯이 성공한 자식이 아니라서, 그 세월을 보상해주지 못해서, 하나밖에 없는 딸이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