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김과장 Dec 26. 2023

03. 아빠의 마지막 편지

그리움과 미움의 사이에서

'아빠' 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참 아프다. 


12살, 빠는 엄마와 이혼 후 나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떠났다. 난 아빠가 나와 엄마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12살의 난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아빠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떠났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던 것 같다. 꼬깃꼬깃 접은 아빠의 편지를 지갑에 넣어둔 건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난 아빠를 다시 만나는 날까지 이 편지를 지갑에 넣고 다녔었다. 아빠도 편지를 쓰며 울었을까. 아직도 물어보지는 못했다.


아빠가 떠나고 엄마와 둘이 사는 삶은 쉽지 않았다. 젊고 연약한 36살의 여자와 12살의 어린 여자애가 사는 삶은 뻔하지 않은가. 그때를 생각하면 온 세상이 차갑고 무서웠던 기억이 남아있다. 선택적 기억상실인지 12살부터 16살까지의 기억이 흐릿하다. 아마 그 시기가 가장 힘들었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내가 중학교 3학년, 그러니까 16살쯤이 되었을 때는 엄마에게 집적거리는 옆집 아저씨로부터 엄마를 지킬 수 있었다. 엄마도 내가 그 정도의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까지 한 4~5년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14살쯤 어느날, 하교를 하고 집에 온 나는 울고 있는 엄마와 마주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엄마의 손에는 종이가 들려있었고 나는 나중에 몰래 그 종이를 꺼내보았다. 그리고 그 종이는 아빠의 재혼을 알 수 있는 서류였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주민등록등본? 가족관계증명서? 그런 종류였던 것 같다. 엄마가 그 서류를 어떻게 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충격적이었던 건 나와 엄마를 버린 아빠가 다른 여자와 재혼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난 그날부터 아빠에 대한 그리움보다 원망과 증오만 남았던 것 같다. 

엄마는 원망의 눈빛을 담아 나를 보며 말했었다.


"넌 네 아빠랑 꼭 닮았어."

"널 보면 자꾸 네 아빠가 생각나."


아빠를 닮았다는 말이 너무 싫었다. 엄마가 미워하는 아빠를 닮은 나를 엄마가 버릴까 봐 불안했다. 나의 불안증은 그때부터 심해졌던 것 같다. 어느 상담센터에서 나의 병명을 이렇게 말했다.

유기 불안. 엄마마저 날 버리고 갈까봐 난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 버릇과 습관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이제는 엄마가 날 버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아직도 엄마의 눈치를 본다. 그리고 요즘도 가끔 엄마는 나에게 아빠를 닮았다는 말을 한다. 난 세상에서 아빠를 닮았다는 말이 가장 싫다. 아빠처럼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반대로 살기 위해 애쎴다.


"네 아빠는 애가 없으니까 재혼을 했지."


엄마의 이 말은 나 때문에 엄마가 재혼을 못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리고 그게 현실이기도 했다. 그 당시 애 딸린 이혼녀가 재혼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자책이 심한 걸까. 엄마가 나 때문에 불행해졌다고 생각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슨 생각들의 끝은 늘 아빠에 대한 원망이었다.


"이 모든 게 아빠 때문이야. 아빠가 날 버리고 가서 이렇게 된 거야. 아니, 아빠 사업이 망해서 이렇게 된 거야."


내 인생이 이렇게 된 원인을 모두 아빠에게 돌렸다. 그렇게 아빠라도 원망해야 살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빠도, 엄마도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아빠를 다시 만난 건 스무살 때였다. 수능을 보고 1월이 되어 성인이 되던 날, 난 아빠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적힌 쪽지 한 장을 들고 경찰서로 갔다. 


"이 사람 좀 찾아주세요."

"이 사람이 누군데?"

"아빠요. 주민등록번호로 찾을 수 있어요?"


경찰관은 웃으며 안된다고 했다. 아빠라도 개인 정보는 알려줄 수 없다고. 난 아빠를 찾아서 묻고 싶었다. 왜 엄마와 날 버리고 가서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까지 했냐고.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아냐고. 엄마가 얼마나 날 힘들게 온힘을 다해 키웠는지 아냐고. 그래도 엄마 덕분에 잘 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날 키운 건 엄마라고. 당신은 내 아빠 아니라고, 꼭 말해주고 싶었는데 아빠를 찾을 방법이 없었다.

난 집으로 와서 창고 깊숙히 있던 아빠가 미처 찾아가지 못했던 아빠의 짐을 꺼냈다. 낡은 박스에는 아빠가 쓰던 노트와 메모장 같은 것들이 있었고 난 그 안에서 익숙한 아빠의 친구 이름을 찾았다. 그리고 옆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빠의 친구에게 내 핸드폰 번호를 남기고 얼마 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

"누구세요?"

"......아빠야."


8년 만에 듣는 아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빠라는 소리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어색한 몇 분 간의 통화 후 며칠 뒤에 8년 만에 아빠와 마주할 수 있었다. 

아빠와 카페에 마주앉아 처음 든 생각은 '날 버리고 갔으면 잘 살기나 하지.' 였다. 내 기억 속, 그리고 사진 속의 아빠가 아니었다. 다시 만난 아빠는 늙고 작고 초라했다. 

아빠와의 재회 이후 난 알 수 있었다. '가난'과 '빚'이라는 늪에서 우리 세 가족은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차라리 아빠를 찾지 말 걸 생각도 했다. 

TV에 나오는 누구는 수십억도 갚아내던데 우리 가족이 진 몇 억의 빚은 10년 넘게 가족 3명을 괴롭히고 있었다. 

아빠에게 오열하며 원망을 쏟아냈던 어느 날, 난 주저앉아 울었다. 전화기 너머 아빠도 많이 우셨다. 


아빠는 요즘도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하신다. 

이제 20년이 훌쩍 넘은 일이고, 웃으며 아빠와 소주 한 잔도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아빠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아빠에게 받은 상처는 아물어 흉터가 되었지만, 한번씩 내 과거를 돌아볼 때면 아직도 흉터가 저릿하다.


이제는 늙어버린 아빠를 보며, 그래도 버티고 살아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젠 내가 엄마,아빠에게 미안해졌다. 

보란 듯이 성공한 자식이 아니라서, 그 세월을 보상해주지 못해서, 하나밖에 없는 딸이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02. 엄마의 눈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