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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김과장 Feb 26. 2024

14. 그의 가스라이팅

자아 존중감의 중요성

가장 예쁘고 빛나야 했던 22살, 나는 한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이 아빠의 부재가 결핍으로 작용하여 난 연애를 쉬지 않았고, 남자친구에게서 아빠의 결핍을 채워보려 했었다. 20대 초반의 연애들은 대부분 짧게 끝났다. 그리고 나의 첫 장기 연애가 22살에 만난 남자였다. 그 남자를 편의상 S라고 부르려고 한다.


S는 나보다 4살이 많았다. 그리고 자존감, 자신감이 아주 높은 사람이었다. 자존감이 낮았던 나에게 S는 닮고 싶을 정도로 멋있어 보였다. S와의 연애는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S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많았지만, S와 나는 서로 끌렸었다. 그렇게 시작한 연애는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뭐랄까, 내가 지금까지 했던 어린 연애와는 조금 다른 어른의 연애처럼 느껴졌다. 어딜 가나 자신감에 넘치던 그는 나를 리드했고 그와의 데이트는 행복했다. S는 키도 크고 옷도 잘 입었다. 본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잘 알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연애를 할수록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멋진 사람이 왜 나를 만날까? 난 보잘 것 없는데.'


그를 만날수록 나는 자신감이 없어졌다. 반대로 생각했으면 좋았을 걸.


'저렇게 멋진 사람이 나를 좋아하니까 자신감을 갖자.'


어쨌든 S와의 연애는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1년간.

1년이 지나자 그는 나에게 이런 말들을 자주 했다.


"나니까 널 만나지."

"나 아니면 누가 너 만나줄 것 같아?"

"너네 집 사정 다 알고 누가 결혼하겠어?"

"나랑 결혼하고 싶으면 이렇게 해."

"옷 좀 예쁘게 입어."

"좀 꾸며라."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는 꾸미지 않고 화장도 하지 않는 내가 좋다고 했던 그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S에게 의지하고 있었기에 우리 집 사정을 모두 말했었다. 처음에는 열심히 살았다고 고생했다던 그가 어느새 그 사실을 약점 삼아 나를 가스라이팅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가스라이팅인 줄 몰랐다.) 본인이 아니면 안될 것처럼 나에게 저런 말들을 내뱉었고 나는 S의 말에 수긍했다. 그러면서 자존감은 점점 낮아졌다. S의 집안은 제법 잘 나가는 집안이었다. 반지하집에 엄마와 둘이 살던 나는 그와 나를 비교하며 점점 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느날 그의 학교 컴퓨터에 그의 싸이월드가 로그인된 채 있었고 난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보고 말았다. 그당시 싸이월드 방명록에는 비밀 방명록 기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 방명록에 다른 여자가 남긴 글이 있었다.


"선배님~ 그날 술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마셔요~."


나에게는 돈이 없다고 하던 그가 다른 여자에게 술을 사줬다. 나에게는 술을 마시지 말라던 그였다. 나는 그 당시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학자금 대출도 받는 상황이었는데도 그와 데이트에서 반반 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선물 한번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다른 여자들에게 돈을 쓰고 다닌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울면서 그에게 따지던 그 날, 그는 화를 내며 나를 벽에 밀쳤다.


"왜 남의 컴퓨터를 훔쳐봐!"


내가 속상한 상황이었는데 난 그에게 결국 사과했다. 내가 미안하다고. 나는 3년 동안 그와 사귀며 나를 갉아먹었다. 우리의 싸움은 늘 나의 사과가 아니면 풀리지 않았다. 나는 그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그의 집앞에 찾아가 기다리기도 하고 그에게 선물을 사주기도 했다. 그는 여러번 다른 여자들과의 스캔들이 있었지만, 난 늘 아무 사이 아니라는 그의 말을 믿었다. 글을 쓰다보니 정말 병신같은 연애였다.

3년이 되던 해, 나는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내가 이별을 먼저 말할 수 있었던 건 나의 친구들 덕분이었다. 그의 본성을 알아본 친구들은 나를 설득했고 나는 많이 울었다.


"넌 정말 착하고 예쁜 애야. 네가 왜 그런 놈을 만나면서 상처받아야 하는 지 모르겠어."


친구의 말에 조금은 정신이 들었던 것 같다. 그와의 다툼에 매일 울던 나를 보며 말해준 친구에게 지금도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별을 말하고 며칠 뒤, 그에게 전화가 왔다.


"네가 감히 나한테 헤어지자고 해?"


그는 나와 헤어졌다는 사실이 속상한 게 아니라 내가 헤어지자고 먼저 말한 게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 오빠가 헤어지자고한 걸로 해."


그에게 돌아온 말은 쌍욕이었고, 난 전화를 끊었다. 그 후에 알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차였다고 말하며 내 욕을 하고 다녔다고 했다. 그 후에도 학교에서 마주친 그는 졸업할 때까지 나를 괴롭혔다. 헤어지고 나서도 난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잘못한 게 있지 않을까? 아니면 S가 그럴 리가 없잖아."

"병신."


끝까지 병신같은 연애였다.


인생에서 가장 예쁘고 빛나야 했던 22살,23살,24살,25살을 나는 S와의 거지같은 연애로 날렸다. 그래도 하나 얻은 게 있었다. 남자 보는 눈을 조금 키웠다고 해야할까. 다행히 그 이후의 연애들은 후회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와의 연애가 끝나고도 바닥친 나의 자존감을 올리기 위해 거의 10년이 걸린 것 같다. 옆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때는 몰랐다. 지금은 나를 깎아내리려는 사람에게는 당당하게 말하고, 인연을 끊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자존감 :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감정]


자아존중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자존감이 과하면 어떤 사람이 되는지 일깨워주는 연애였다.

지금도 가끔 난 실패한 인생이라고 난 못났다고 느낄 때가 있지만, 예전처럼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존중하겠는가.


우울증약을 먹은지 벌써 네 달쯤 된 것 같다. 너무 다행히 약발은 잘 받고 있는 것 같고 긍정적인 마음도 많이 돌아왔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도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나는 제법 괜찮은 사람이다.


(연애 후기)

S는 나와의 연애 이후 여러 번의 연애 후 한 명과 결혼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했던 것처럼 여전히 자신의 와이프를 깎아내리고 있었다.


"걔는 내가 시키는 건 다 해. 내가 오라면 오고. 말 잘 들어서 결혼했잖아."

"걔랑 이혼할 뻔했어. 이혼 안 하려고 애 가졌잖아."


어느 선배의 결혼식에서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와이프에 대해 한 말이었다. 저걸 자랑이라고 말한 걸까. 자신이 돋보이고 싶었을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깎아내리는 게 얼마나 없어 보이는 건지 S가 죽기 전에는 깨닫길 바란다. 너와 헤어져서 너무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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