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상을 만드는 '나'라는 프리즘
개인적으로 나는 칸트가 주장한 ‘관념론’의 팬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칸트의 관념론은 나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치며 근간을 형성했다.
그렇다고 내가 임마누엘 칸트라는 철학자의 심오하고 위대한 철학세계에 대해, 관념론에 대해 다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이해한 - 이해한 것이 맞다면 - 관념론의 핵심은 나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관념론에 대한 이론적인 정의를 잠시 짚고 넘어가기 위해 네이버 검색결과의 일부를 잠시 빌려오겠다.
“공간과 시간은 경험적으로 실재적이지만 초월적으로는 관념적이다.” “만일 우리가 주관을 제거해버리면 공간과 시간도 사라질 것이다. 현상으로서 공간과 시간은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고 단지 우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칸트의 관념론 (태양을 멈춘 사람들, 2016. 08. 05., 궁리출판)
인식이란 외계에 있는 사물의 단순한 모사(模寫)가 아니다. 즉, 인식이 성립하기 이전에 이미 대상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무질서한 질료를 주관형식에 따라서 정리하여 비로소 대상이 성립한다. 즉, 대상은 주관에 의해서 구성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구성설(構成說)에서는 인식의 대상은 대상의 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성립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칸트와 독일관념론시대의 철학 (두산백과)
내가 이해한 관념론은 이렇다. (누구나 그렇듯, 나의 경험과 편의에 따라 이해한 것이니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중요한 것은 관념론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나의 인식이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사물, 사람 등 모든 것은 우리의 인식 안에서 존재한다. 그렇다고 객관적인 실재가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사실 알 수 없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회의주의까지 끌어들이게 되니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 어쨌든 모든 대상은 결국 각자의 인식에서 제각기 다르게 존재한다. 나의 감성과 이성, 경험과 지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인식 안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간단하게 이해한 관념론의 예는 이렇다. 우리 앞에 사과가 놓여 있다고 생각해 보자. 먼저 우리가 그것을 사과라고 인식하게 된 것은 물체에 반사된 가시광선 덕분이며, "둥글고 꼭지가 있으며 대체로 빨간 색을 내고 먹을 수 있는 저것을 사과라고 부르자"라는 사회적 약속과 그 본질적인 속성을 인지한 학습효과 덕분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 앞의 물체가 사과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사과가 모두의 눈에 같아 보일까? 우리가 사과라고 인지하고 있는 물체에 대한 인식은 동일할까? 가령, "저 사과는 빨갛다"라고 말할 때, 내가 보고 느끼는 빨간색과 내 옆의 다른 사람이 보고 느끼는 빨간색이 과연 같은 빨간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인식하는 사과의 동그란 정도가 다른 사람이 인식하는 정도와 같을까? 나는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동시에 두 명 이상이 되어 같은 사물을 보지 않는 이상 모르는 것이지만. (절대로 모를 일이라는 뜻이다.)
이런 생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결국 세상이라는 것은 각자의 인식 안에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로 우리가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내게 세상이라는 건 어떤 정해진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이나 공간도 아니며, 영원히 객관적일 수 없는 곳이다.
각자의 가치관과 시각으로, 각자의 마음에 존재하여 사람 수만큼 무수히 많은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세상이다. 그만큼 무수히 많은 세상이 존재하고, 우리는 각자가 세상의 창조자이자 주인공으로 살아간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써지는 인생 속 세상이라는 배경은 주인공이 느끼고 경험하는 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라는 것 또한 어쩌면 이의 연장선상은 아닐까.
사실 이런 관점은 내게 평생을 살아가며 풀어가야할 엄청난 숙제를 안겨 준다. 세상이 결국 나의 인식에서 존재한다면, 바꿔 말하면 내 인식이 결국 내 세상을 좌우한다.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내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대상, 경험 등을 어떻게 해석하고 판단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들이 나라는 인간의 프리즘을 거치면 어떻게 보여지게 할 것인지는 나의 감성과 이성에 달려있다. 따라서 나는 언제나 나라는 프리즘이 이왕이면 더 나은 세상을 보여줄 수 있도록 스스로 배우고 수련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내가 변하지 않는 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내가 변하지 않는 한, 세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커져야 내 세상이 커진다. 내가 경험하고 인식한 만큼이 결국 내 세상의 크기가 되기 때문이다.
더 좋은 세상, 더 행복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면 결국 바꿔야 할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