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가치에 대한 생각
조직문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핵심가치'라는 것이다. 핵심가치는 말 그대로 '핵심'이 되는 '가치'이다. 영어로는 core value, 즉 중심이 되는 가치이다. 무엇에 핵심이 되고 중심이 될까? 경영에 수반되는 모든 것들이다. 기업이 비즈니스를 하면서 수반되는 모든 판단과 선택, 행동 등에 중심이 되는 가치인 것이다.
미션이나 비전이 있는 기업이라면 바늘에 실처럼 따라붙는 것이 바로 이 핵심가치인데, 그만큼 그럴듯한 가치로 구색만 갖춰놓는 기업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미션이나 비전이 그런 것처럼. 앞선 글 '언제나 출발은 '왜?'여야만 한다'에서 기업이 존재하는 목적, 'Why'는 곧 기업의 미션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기업이 존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이 'How'에 대한 답은 바로 핵심가치에서 찾을 수 있다. 기업이 사명을 다하기 위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가치 기준이 핵심가치인 것이다.
잠시 기업이 아닌 우리 개개인의 삶으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의 삶은 순간순간의 수많은 선택으로 채워진다. 선택을 하는 판단의 기준은 제각기 다르고, 선택에 따른 결과에 반응하는 방식 또한 각자가 중요시하는 가치에 따라 달라진다. 이토록 다양하고 복잡하며 어려운 선택의 연속으로 이뤄진 삶을 제대로 잘 살아가기 위해선 명확한, 그리고 좋은 가치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명확하고 좋은'이라는 2개의 수식어를 주목해야 한다. 두 개의 조건 모두가 충족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가치가 명확하지 않으면 매 순간 선택의 기준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 우물쭈물하다 삶이 흘러가 버릴 거고, 명확하지만 좋은 가치가 아니라면 결과적으로 내 삶과 우리 사회의 질서를 파괴해 버리는 선택만 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인생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기업의 생도 인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한 개인에게도 가치가 필요할진대, 서로 다른 수많은 개인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의해 모여 구성된 기업은 어떨까? 각자가 다른 생각을 하고, 각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로 의사결정을 하는 조직은 마치 수백 명이 연결된 2인 3각 경기에서 모두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려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여러 사람들이 모인 조직, 기업에는 공통의 가치가 필요하다. 같은 조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방향성을 얼라인먼트 시켜줄 수 있는, 명확하고 좋은 중심축 말이다.
우리 기업에 어떤 가치가 필요한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내 경험과 판단에 따르면, 이 또한 기업의 Why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가장 먼저 기업의 존재 목적에서 찾아보자. 정답은 언제나 문제 속에 있듯, 기업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미션에서 답을 찾아볼 수 있다. 누구에게나 좋은 가치 말고, 우리만의 미션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꼭 사수해야만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찾아보자.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결코 직관에 의존하거나 단편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의 깊이보다 한 단계 이상 더 깊숙이 고민해야만 그중 진짜로 핵심이 되는 가치들을 선별하여 우리만의 언어로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이 생략되면, 소위 '정직, 배려, 존중'과도 같은, 식상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조차 식상한 일반적인 가치가 기업의 핵심가치로 등장하기 쉽다. 아, 오해는 금물이다. 이 가치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정직, 배려, 존중 같은 가치는 우리 사회를 지속가능케 하는 절대적으로 소중한 가치들이다. 그리고 바로 이게 기업 핵심가치로서 자격을 얻지 못하는 이유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지켜야 할 가치들은 비단 기업뿐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모두가 지켜야 하는 기본가치이지 기업의 핵심가치로는 생명력이 없다. "도둑질은 나쁜 짓입니다"라는 당연한 말이 도둑질을 그만두게 만들지는 못하는 것처럼. (만약 보편타당한 가치라 하더라도 그것만이 우리의 사명을 달성하는데 가장 우선되는 것이라면, 그걸 함께 지켜나가야 하는 직원들을 위해서라도 다른 표현으로 만들어보자. 사람들은 뻔한 말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도록 태어났다. )
또 하나, 기업의 핵심가치에는 반드시 구성원들 간의 진짜 이해와 공감대가 필요하다. 가치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가치 있지 않다. 가치는 누군가 실현하고자 할 때 비로소 가치를 얻는다. 기업의 핵심가치는 구성원들이 함께 실천해야 하는데, 정작 행동의 주체가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도 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직원들이 공감하는 핵심가치를 끌어내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가슴 뛰는 명확한 목적을 갖고 이를 위해 추구하는 가치도 구체적으로 정립된 상태에서 비즈니스를 시작한 후 이 가치에 공감하는 사람들로만 조직을 꾸리면 된다. 그럼 직원들에게 핵심가치를 설명하고 이해와 공감을 구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정말 이상적인 얘기다. 그만큼 허황되기도 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대부분의 기업은 이렇지 않다. 좋은 아이디어가 타이밍을 잘 만나 우연히 기업으로 성장했거나 특별한 철학 없이 운영되던 회사가 점차 규모가 커져 일종의 규율이 필요해졌거나, 또는 다른 기업 모두 핵심가치 하나쯤은 있는 것 같아 따라 만드는 경우 등 대부분은 이미 조직이 굴러가고 있는 시점에서 미션과 핵심가치를 사후에 만들곤 한다. 그렇다면 이 경우 기업은 먼저 직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게 좋다. 이미 그들 사이에는 그들이 중요시하는 가치가 있거나 조직이 이 정도 성장해오기까지 우선적인 판단기준이 되었던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단지 끄집어내 정리하고 명문화하지 않았을 뿐 이미 형성되어 있는 문화 속에 도드라져 보이는 가치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한번 나열해보고 우리의 미션, Why와 부합하는지 따져보는 것이다. 이미 형성되어 있고 직원들이 중요시한다고 하여 좋은 핵심가치는 아니기에 반드시 미션과 정렬시켜 보고 가치를 검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단, 이 과정은 경영진이나 일부 조직의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과정이 아니라, 직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투명한 과정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핵심가치가 '회사의 가치'가 아닌 '우리의 가치'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다듬어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그 가치를 실천하자는 요구도, 실천하지 않았을 때의 책임도 함께 물을 수 있다. 그 이후에는 전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업의 핵심가치를 자신의 가치로 삼을 수 있는, 우리의 가치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채용하면 된다. 사실 미션과 핵심가치를 제대로 만들고 이것이 문화로 표현되고 있다면,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기업에 모여들고 이로 인해 기업은 조직의 가치를 강화하며 다시 또 그런 사람들만 채용하는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 수 있다. 이는 우리가 핵심가치를 제대로 만들어 놓아야 할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위의 과정을 통해 핵심가치가 도출되었다면 이제 해야 할 것은 우리만의 언어로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앞서 기업의 핵심가치는 명확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구체화 작업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기업 핵심가치는 구성원들 모두가 이해하고 공감하며 일상 업무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핵심가치가 추상적이고 철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면, 의사결정의 기준도 될 수 없고 공통의 행동양식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사람들은 같은 단어를 두고도 각기 다른 이해와 해석을 내놓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절약'이라는 말은 어떤가? 어디에서 무엇을 얼마만큼 아끼는 것이 절약인가? 내가 생각하는 절약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절약은 아마 천차만별일 것이다. 하물며 가치라 불리는, 그 자체의 의미도 딱 부러지게 정의하기 힘든 가치들이 하나의 명사 또는 하나마나한 일반적인 정의 정도로 표현되어 있다면 그걸 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제대로 정의되고 표현되지 못한 핵심가치는 결국 구성원 각자의 필터를 거쳐 제멋대로 해석될 것이다. 아니, 애초에 구성원의 눈과 마음을 잡아끄는 것조차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기업의 핵심가치는 두루뭉술했을 초기 버전에서 멈추지 않고, 잘게 쪼개고 한 껍질씩 벗겨내며 핵심만 남긴다는 생각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 또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적은 지, 실제 업무에서 경험할 다양한 상황이나 의사결정 시 써먹을 수 있는지, 결정적인 순간에 기업의 미션과 가치에 부합하는 선택을 이끄는 단서를 제공하는지 등을 토대로 점검하고 또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핵심가치는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기업의 모든 경영활동에 반영되고 통합되어야 한다. 특히, 핵심가치는 채용뿐 아니라 구성원들을 평가하고 피드백하는데 쓰이는 도구로써 제대로 활용되어야 한다. 기업에서 평가나 리뷰 과정을 통해 피드백을 주는 이유 중 하나는 조직 안에서 어떤 행동이 인정받고 보상을 받는지, 반대로 어떤 행동은 개선되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이 과정 속에 핵심가치가 주요한 근거가 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과정을 통해 기업은 핵심가치에 부합하는 행동을 유도하고 강화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기업의 미션과 핵심가치는 곧 온 세상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OO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고, OO을 이루기 위해 이러이러한 가치들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며, 여기에 진정으로 공감하고 동참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미션의 미션이 대내외에 우리의 존재 목적을 알리고 공감대를 형성하며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듯, 핵심가치의 가치는 존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이 함께 생각과 행동의 잣대로 삼아야 할 우리만의 DNA를 조직에 수혈하는 데 있다. 부디 미션과 핵심가치가 기업의 외관을 꾸미는 포장지로만 사용되지 않고, 기업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와 우리 삶에 부여하고자 하는 가치를 설명해줄 수 있기를, 나아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서비스와 제품으로 우리 앞에 탄생되는 경우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조직문화 담당자로서 미션과 핵심가치 같은 걸 운운하고 있지만, 내 개인의 미션과 핵심가치도 아직 뚜렷하게 정립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인 것임은 분명하다. 최근 베스트셀러인 '신경 끄기의 기술'이 문득 생각난다. 내가 신경 써야 할 것들, 우선순위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만 남기고 그 외는 신경을 끄는 것. 어쩌면 이것도 핵심가치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좋은 가치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그런다고 해서, 그게 나한테도 좋은 것은 아니다. 어차피 모든 것을 다 신경 쓸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 중요한 건 일생에 걸쳐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시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개인이든 기업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