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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Aug 13. 2020

내 지인들은 나를 어떤 유형으로 평가할까?

나는 사람을 크게 네 부류로 생각한다. ‘알면 알수록 더 괜찮은 사람’과 ‘알면 알수록 별로인 사람’ 그리고 시작점이 호감이든 비호감이든 ‘처음과 끝이 한결같은 사람’ 이 중에서 가장 되기 어려운 유형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흔히들 사람에 대한 호감이 플러스(+)에서 마니어스(‐)로 가는 것은 한순간이어도 마니어스(‐)가 플러스(+)가 되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알면 알수록 더 괜찮은 사람’이지 않을까. 평가를 하는 입장이든, 받는 입장이든 상관없이 내 경우에도 대부분 그랬다. 그러고 보니 문득 궁금해진다. 내 지인들은 나를 어떤 유형으로 평가할까?


A는 업계에서 부와 명예뿐 아니라 존경과 신뢰까지 가진 소위 말하는 ‘네임드’였다. 그런 A와 같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내게 찾아왔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기쁘고 좋다는 마음보다는 간사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냥 나는 잠시 같이 일하는 팀원일 뿐인데, 마치 나까지 A와 같은 레벨(!)로 업그레이드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던 것 같다. 그만큼 A는 빛이 나는 사람이었고, 같이 있으면 나도 왠지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내 기대는 고작 한 달 만에 산산이 부서졌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모습과 함께 일하면서 알게 된 A는 차이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180° 다른 사람이었다. 물론 내가 A에게 이런 모습을 바랐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내 기대까지 책임져 달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단지 나는 이중적인 모습의  A가 계속 업계 탑으로 상징되고, 성공의 표본으로 남는다는 사실이 불편했고, 그런 현실에 좌절했다.


내가 A에게 가장 크게 실망했던 부분은 사람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없다는 것.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A는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 특히 약자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고, 공감하며, 이해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A 스스로도 그 점을 가장 큰 자부심으로 여겼다. 하지만 내가 본 A는 전혀 아니었다. A의 말이 법인 것은 아니지만 그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없었다. 의사 결정의 중심에 A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A는 대부분의 사람을 하대하거나 홀대했고, ‘감히 나에게’ ‘이따위를 나에게’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썼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생기면 보이콧하는 게 취미인 것도 같았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프로젝트가 이대로 엎어질까 봐 안절부절못해야 했다. 어떤 동요도 없이 그 상황이 만족스러웠던 건 오직 A 뿐이었다.


기본적으로 그런 마인드의 사람이니 강자한테 약하고, 약자한테 강한 ‘강약약강’의 자세를 취하는 건 사실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A는 스스로 얼마든지 ‘강강약약’의 사람처럼 보이도록 자신을 포장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었고, 그런 A를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직 같이 일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만큼 A는 자신의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일에 능수능란했고, 가장 프로페셔널했다.


처음부터 A가 그런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어느 순간 그렇게 됐는지는 그때의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그동안 A가 말해온 사람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실은 그런 척하면서 상대를 깔보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 그 마음에 처음으로 회의감이 들었다.


사람들 중에는 멀리서 볼 때, 멋있는 사람이 있다. A처럼. 나는 A를 ‘알면 알수록 별로인 사람’으로 분류했다. A를 겪지 않았다면 여전히 A는 나의 롤 모델 중 하나로 남았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진실을 알지 못한 채 A를 계속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어쩌면 더 좋았을까?


종교는 없지만 나는 A가 잘 되지 않기를 기도했다. A가 이룬 성공은 충분히 박수받을 만한 일이고, 그 사실까지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A를 향하는 무한한 존경과 신뢰는 반드시 거두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 부처님을 소환해서 그런지 내 기도발은 1도 안 먹히는 것 같았다. A는 여전히 잘 나갔으니까. 역시 A처럼 해야 성공할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해서 씁쓸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A는 그 뒤 얼마 못가 업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듣자 하니 그동안 굳건했던 A의 평판이 일순간 나빠졌다고 했다.


평판이 좋으면 좋은 사람인 걸까? 나는 A를 겪으면서 평판은 참고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도 한때 어느 브랜드의 돌침대나 영화 평점처럼 별이 다섯 개가 되기 위해서 살았던 날들이 적지 않았다. 마음먹고 적당히 그런 척하고 살면 평판이야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특정한 순간에 최고 기록을 달성하면 평생 기록으로 인정되는 올림픽 축제 같은 것이 아니다. 전력투구로 최고점에 빨리 도달하는 것보다는 얼마나 꾸준하게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진짜 내 것이 아닌 거짓 연극은 한두 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면 결말은 둘 중 하나다. 스스로가 지쳐서 포기하거나, 언젠가는 진실을 들키거나.


나는 별이 다섯 개가 되는 욕심을 버렸다. 대신 '호'도 '불호'도 아닌 중간 점수인 별 두 개 반을 내게 줬다. 사람들에게도 딱 그 정도만 어필했다. 가끔은 나를 혹평하는 사람도 있었고, 내 기대 이상으로 과한 칭찬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더 이상 그런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판정단 점수 중에서 최고점과 최저점은 빼고 평점을 내는 것처럼 어쩌다 생긴 오류 정도로 받아들였다. 기대치가 높지 않았으므로 자연스럽게 실망하는 날은 전보다 훨씬 줄었다. 그리고 실망으로 꽉 들어차 있던 자리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라는 자신감으로 채워졌다.


지금 내가 바라는 건 하나다. 나를 겪어본 사람들이 나를 ‘알면 알수록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해주면 좋겠지만 ‘알면 알수록 별로인 사람’만은 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래서 나는 오늘도 평점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진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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