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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Oct 15. 2020

인생 첫 잠옷.

‘고객님 반갑습니다. 행복을 전하는 **택배입니다. 고객님이 기다리시던 상품이 도착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이 택배 기사님은 일주일 넘게 우리 집으로 매일 출근도장을 찍었다. 하필이면 내가 주문한 업체 모두, 같은 택배사를 이용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 돈 내산’이라서 잘못한 것도 없고, 대면하지도 않았지만 왠지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다소 억울(?)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고...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몇 달 동안 긴축재정을 한 탓에 거의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카드 사용내역은 정말 투명했다. 오로지 먹는 것뿐. 엥겔지수는 최고치를 경신했다.


그런데 이번 달 들어 지름신이 강제 컴백했다. 이상하게도 꼭(?) 사야 할 것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한꺼번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용량으로 쟁여놓은 샴푸, 린스가 장렬히 마지막 펌핑을 마치고 나자 그다음 날에는 주방세제와 세탁용품이 동났다. 타이밍 맞춰서 스킨, 로션, 수분 크림이 나란히 바닥을 보였고 고추장, 참기름이 마지막으로 내 최애 음식 비빔밥을 남기고 재활용품 통으로 함께 떠났다. 나는 쇼퍼홀릭처럼 매일 인터넷 주문을 했다. 거의 이사를 하고 물건들을 새로 집에 채워 넣는 수준이었다. 마지막 주문(?)을 마치고 나서 나는 기도했다. 제발 다른 기사님이 와주세요라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같은 기사님이었다. 이번에 도착한 것은 잠옷이었다. 잠옷은 내 인생에서 처음 산 것이기도 하고, 근래 내가 산 것 중에서 필요하지 않지만 갑자기 사고 싶어서 산 유일한 한 가지였다. 내게 잠옷은 사치품이다. 지금까지 ‘잘 때만 입는 옷인데 이렇게 비쌀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나와는 반대로 누군가는 잘 때 입는 옷이니까 비싼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굳이’라고 생각해 오던 마음을 바꾸게 한 것은 50% 세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보다 더 끌렸던 것은 사실 모델의 핏이 너무 예뻐서였다. 저 옷을 입으면 모델처럼 하늘하늘해 보일까 기대를 갖게 됐다. 명색이 이름이 ‘잠옷’인데 잠을 잘 잘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조금도 되지 않았다. 잠옷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처음이라서 당황스러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결제까지 마친 상태였다.


마음을 뺏긴다는 것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단점도 눈감게 했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산 잠옷은 면이 아니어서 땀 흡수가 잘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살짝 설레기도 했고, 존중받는 느낌도 들었다. 면 티와 트레이닝 바지를 잠옷으로 입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그동안 남들은 모르니까, 대세에 지장 없으면 된다는 핑계로 모른 척 해왔던 것들이 있다. 설거지가 귀찮아 냄비채로 먹던 라면처럼 나만 보는 나를 소홀히 했다. 잠옷도 그중 하나였다. 왜 나는 남들 눈에 비친 나만 신경 썼을까. 잠옷을 입고 요리조리 거울 앞을 서성이는 나는 이렇게나 행복한데...


말로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게 다인 것처럼 살았다. 남들이 보는 것은 이것저것 꼼꼼하게 따졌으면서도 오직 나만의 것은 대충 했다. 집을 둘러보니 가구며 식기며 침구며 내가 애정을 쏟은 게 하나도 없었다. 그냥 그때그때 저렴한 것을 샀다. 하나뿐인 나만의 공간이지만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었지만 처음으로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생겼다. 내 인생 첫 잠옷.


‘고객님이 주문하신 상품이 택배사에 도착 예정입니다.’


내친김에 침구를 주문했다. 새로 산 잠옷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언제가 홈쇼핑에서 너무 착한 가격이라서 디자인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도 구입한 5년도 넘은 이불세트를 바꾸기로 했다. 뭔가 배보다 배꼽이 커진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정도의 지출을 오직 나를 위해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는 남들에게 보이는 나를 위해 투자했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할 나를 위해서도 써야지. 쓰고 보니 그냥 쇼핑 명분을 하나 더 얻은 것 같기도 하다. 하하하!


그나저나 이번에도 같은 기사님이면 좀 부끄러운데... 배송 조회를 조심스럽게 클릭했다. 이게 왜 다행처럼 느껴지는지 잘 모르겠지만 드디어 다른 택배사다! 당분간 쇼핑은 끝! 진짜 바이 바이... 여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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