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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Oct 16. 2020

‘선택에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바꾸시겠습니까?'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우리말 겨루기>를 보게 됐다. 2명씩 한 팀을 이뤄 4팀이 다양한 종류의 우리말 퀴즈를 맞히는 장수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틀었을 때는 끝까지 살아남은 한 팀이 '우리말 달인'으로 등극하느냐 마느냐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일반인들이 주로 출연하는 프로그램인데 어딘가 얼굴이 낯이 익었다. 가만 보니 중년의 남녀 배우였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일반인 예심을 보지 못하는 관계로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진출했다. 마지막 관문은 둘 중에 맞춤법에 맞는 단어를 고르는 양자택일 문제로 3문제를 모두 맞춰야 했다. 두 사람이 신중하게 답 선택을 마치자 늘 그렇듯 MC는 바꿀 기회를 제시했다. 이런 장면은 물론 재미와 긴장감 조성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제작진의 의중이 과연 정말 맞히게 하기 위한 제안인지, 틀리게 하려는 수작(?)인지 늘 의심스럽다. 역시나 확신에 찼던 도전자들은 갑자기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선택에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바꾸시겠습니까?


혼자라면 대답이 쉬웠겠지만 팀이라서 마음이 더욱 갈팡질팡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1번 문제의 답을 바꾸고 싶어 했다. 2번, 3번째 문제는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대답을 마친 여자는 슬쩍 남자의 눈치를 봤다. 나는 속으로 첫 번째 답을 바꾸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는 단호했다. 1번은 맞고, 2번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여자는 그러면 바꾸지 말고 이대로 가자고 했다. 이때다 싶은 MC는 이들을 압박했다.


‘이제 마지막 5초의 시간 드립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두 사람 모두 확신은 없다고 가정할 때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잠시 생각해봤다. 아마 나는 내 선택에 대한 결과를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 다른 팀원의 뜻대로 1번답을 바꿀 것 같았다. 그런데 남자는 1번이 아닌 2번답을 바꾸겠다고 했다. 남자의 결정에 여자는 당황스러워했고 남자는 미안해했지만 후회는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는 3번답도 바꿨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남자의 아주 과감한 선택에 나는 '아!'하고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때부터 나의 관심은 우리말 달인 등극이 아니었다. 오로지 남자의 선택이 불러올 향방이었고 결말이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우리말 달인이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같이 웃을 수 있었다. 남자의 선택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아쉬움대로 3번 문제만 틀렸다.


남자의 자신감, 결단력이 부러웠다. 왜 나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을까 생각했지만 사실 없는  아니다. 되도록 피해 왔을 뿐. 나는 ‘선택’ 그 자체에만 집중하지 못했다. 어떤 선택을 하고 싶냐 보다는 어떤 선택이 내가 져야 될 책임의 무게가 덜 무거울까를 먼저 생각했다. 당연히 매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 앞에서 그 누구에게라도 선택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왕이면 선택에 책임을 진다는 마음을 가져야 했다. 하지만 나는 결과에 책임지고자 했고, 최악이 될 만한 선택만 했다. 반대로 만약 선택에 책임지려 했다면 가능한 한 최고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지 않았을까. 설령 그런 노력이 결과적으로는 헛수고가 되더라도 악을 선택한 것은 때로 비겁함이 될 뿐이지만 선택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경우라면 적어도 후회나 미련은 없었을 텐데... 가끔씩 '만약 그때 그랬다면'에 사로잡힌 나를 보면 그 점이 아쉽다.


어쩌면 후회나 미련이 없는 마음은 결과보다 선택에 책임지려 할 때 덜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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