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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Jun 04. 2021

그녀의 삶이 피곤해 보였던 이유.

        이럴 수가... 내 최애 빵집이 없어졌다! 그곳에서 팔던 하나에 500원인 꽈배기는 내가 지금껏 먹어본 꽈배기 중에 최고! 빵을 좋아하지 않는 나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하루에 10개를 먹은 날도, 삼일 연속으로 찾은 날도 있을 만큼 그 집 꽈배기는 한 번 먹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환상적인 맛이었다. 너무 달지도, 느끼하지도 않으면서 부드럽게 혀에 착, 감기는 맛... 츄릅!   

   

- 아니, 이 동네 산 지가 8년도 넘었는데, 여태 왜 이걸 안 사 먹었지?     


        그 빵집의 존재는 이사 오면서부터 알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횡단보도에서 파란불을 기다릴 때면 그 빵집은 늘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관문’ 같은 것이었달까. 몫이 좋은 자리였지만 어쩌지 외관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간판도, 진열대도, 빵의 종류도 ‘요즘’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였다. 메뉴라고 해봐야 꽈배기, 크림빵, 팥빵, 소보로, 크로켓, 옛날식 샌드위치가 전부였다. 주변의 다른 상점들이 생기고, 바뀌고 하는 동안에도 그 집만 시간이 멈춘 듯 자리를 지켰다.


        인테리어나 리모델링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빵집을 볼 때면 역시 장사가 잘 안 되는구나, 생각하면서도 유일하게 그 빵집만이 매년 그 자리에서 영업하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처음 신기했을 때, 그때 가봤어야 했는데 그러고도 나는 그 빵집을 가지 않았다. 하긴 일 년에 빵집을 고작해야 두세 번 갈까 말까 하는 나였으니... 기억을 돌이켜 보면 나는 그 빵집이 없어지기 2달 전쯤에야 그 집 꽈배기를 처음 먹어봤고, 반했다.      


        전혀 눈에 띄지 않는 간판 탓도 있었겠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기에 나는 위치로 그 집을 기억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냥 ‘동네 빵집’이라고만 말했다. 하루 이틀 방문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어느 단체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자활을 위한 빵집이었다는 것. 그래서 빵의 종류가 아주 다양할 수는 없었다는 것.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제빵사 대여섯 명이 매일 일정 개수만큼만 빵을 만든다는 것. 신선하고 맛 좋은 빵을 만들면서도 프랜차이즈 빵집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저렴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이 될지 몰랐던 마지막 방문. 제빵사 중 한 명이 쓴 것 같은 삐뚤빼뚤 공지를 보기는 했다. 그 집 빵만큼이나 꾸밈없이 담백한 한 줄이었다. ‘*월 *일 영업을 마칩니다.’ 안녕이라는 말도,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도 없었다. 가게 이전 공지도 없길래 드디어 리모델링을 하는구나, 생각하고 말았다. 이런 좋은 사업이, 무엇보다 이 맛을 가진 빵집이 없어질 리는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생각대로 리모델링이 시작됐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자리에는 빵집이 아닌 우동 집이 들어섰다. 이름이 아닌 위치로 기억한 내 최애 빵집은 인터넷을 아무리 검색해도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 당연히 내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약속된 내일 같은 건 없었다.

     

        새로 생긴 프랜차이즈 우동 가게도 묘하게 촌스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그 공간이 가게들을 그렇게 만드는 걸까, 아니면 그런 분위기의 가게들만 그 자리에 생기는 것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한 예능 프로에서 연예인이 자주 가는 단골 우동 가게로 소개된 다른 지점을 보고, 그 자리가 유난히 예스럽게 보이게 하는 것 같다는 것을 알았다. 주문을 위해 설치된 키오스크가 유난히 튀어 보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 우동 하나 주세요


        주문할 때 갖추어야 되는 말투라는 게 딱히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분명 소박하고 평온한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앙칼진 말투였다. 일순간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40대 중후반의 여자 손님이었다. 우동 먹는 의상이라는 것 또한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머리며, 의상이며, 가방이며, 구두며, 화장까지 화려한 구석이 있었다. 마치 '나 이런 데(!) 올 사람 아니야. 그러니까 알아서 대접해.'를 온몸으로 풍기려는 것처럼.     


- 손님, 현금 주문은 저한테 말씀해주시면 되고, 카드 주문하실 거면 키오스크를 이용해주세요.

- 키오스크? 그게 뭔데요?

- 저기 있습니다     


        가게 주인의 손끝을 따라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키오스크 앞에 선 손님. 여전히 공격적인 말투를 버리지 못한 그녀가 궁금해 내 눈도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이미 여러 차례 주문을 한 적이 있는 나는 그녀가 어떤 문구를 마주하고 서 있는지 알 수 있다. ‘주문을 하려면 터치해주세요.’     


- 메뉴가 어디 있어요! 없잖아...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말투. 바빠 죽겠는데 그냥 주문받으면 되지 이딴 게 뭔데 나를 귀찮게 하냐는 말투다. 가게 주인은 음식을 만들고 있어서 직접 해결해주기 어려웠다. 키오스크에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싫어 내가 도와줄까 싶다가도 그녀의 태도가 불쾌해 그냥 지켜만 봤다. 도대체 어째서 그녀는 저리도 막무가내로 당당할까 싶어서.

     

- 화면 눌러주세요. 그럼 메뉴 나올 거예요.

못 이기는 척 화면을 누르자 메뉴가 나왔다.  잠시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대뜸 짜증을 토한다.

- 아니, 없잖아요!

전에 있었던 빵집과 다르게 이곳은 메뉴가 10가지도 넘었다. 당연히 한 화면에 나오지 않았고 <다음>을 눌러야 다른 메뉴도 보였다.

- 다. 음. 을. 누. 르. 셔. 야. 죠. 

   그리고 좋은 말로 물어주세요. 왜 화를 내고

   그러세요?

누가 들어도 손님이라서 참는, 화를 누른 친절. 하지만 그녀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 아니!!! 안 되니까 그러잖아요.

- 기다리세요. 제가 이것만 마무리하고 나가서 도와드릴게요.

    

        보다 못하겠는지 키오스크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던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일어났다. 그녀가 찾는 메뉴만 찾아주고 그는 자리로 돌아가 다시 음식에 집중했다. 내 눈에는 친절을 베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저녁 식사 시간을 방해한 항의 표시로 보였다. 생각보다 빨리 다시 혼자 남겨져서일까. 그녀는 고맙다는 말이 없었다. 어쨌든 이제 결제만 하면 됐다.    

 

- 아니, 카드를 어디다 넣으라는 거야...!

- 아래쪽에 보세요 카드 넣는 곳 있죠? 안 보이면 잠깐 기다리세요     


        결국 사장님이 음식을 만들다 말고 그녀를 도왔고, 때마침 내가 포장 주문한 음식이 나와 나는 그 숨 막히는 분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어떻게 끝날까 궁금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예의 없을 것이고, 자신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었는지는 안중에도 없을 테니까.      


        ‘아니’라고 모든 말에 반박할 게 아니라 ‘죄송하지만’으로 시작하거나 ‘고맙다’는 말로 끝냈으면 될 일이었다. 그녀가 왜 그랬는지 짐작은 된다. 말투만 거셌을 뿐 그녀의 말끝에는 매 순간 주저함이 묻어났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방어적인 사람이 아니라 공격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택한 것 같았다.  모르는 게 창피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예의 없게 행동하는 건 완벽히 창피한 일이다. 무엇보다 그 행동으로 인해 그녀가 감출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보이지 않아도 될 것만 더 보여줬을 뿐.


        해보기 전까지는 나도 몰랐지만,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보다 아는 척하는 게 훨씬 힘들었다. 무시당할까, 서툰 거짓말로 나를 포장해 순간은 넘겼지만 모른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눈치를 보느라 삶은 수시로 피곤했다. 쓸데없는 노력의 결과마저도 절망적이었다. 정작 무지(無知) 보다 거짓을 들켰을 때가 훨씬 더 큰 무시를 받았으니까. 그러고 나면 나는 남들보다 더 많이 나를 무시했다.


    수없이 나 자신을 멸시한 끝에 깨달았다. 스스로를 무시하는 한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수도, 대접받을 수도 없다는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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