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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Jun 25. 2021

나는 보호자의 손을 꽉, 잡고 걸었다.

- 더 늦기 전에 다리 수술해라...!     


        엄마와 동네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잠시 벤치에 앉아 쉬던 엄마가 대뜸 말했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엄마가 다리 수술을 해야 된다는 것도 아니고. 나보고 하라고 엄마? 내 다리 멀쩡한데 왜?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당장 떠오르는 물음표는 많았지만 맥락을 알 수 없어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 너도 엄마처럼 O 다리잖아.

   그거 펴 주는 수술이 있다카든대...     


        그런데,라고 곧바로 묻지 못하고 엄마를 봤다. 엄마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엄마의 시선이 향한 곳은 건너편이었다. 작은 하천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펼쳐진 산책로. 맞은편에는 엄마보다 10년 정도 위로 보이는 70대 후반의 두 할머니가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왼발과 오른발의 보폭이 없다시피 느리게 교차시키면서 걷고 있었다. 엄마는 눈으로 그 두 사람을 따라가면서 말을 이었다.     


- 내가 젊었을 때는 할머니들이 왜 그렇게 걸음을

  못 걷나 했더니... 내가 나이 들어 보니까 알겠더라.

  관절에 힘도 없어지고, 아프고...

  점점 더 다리가 벌어져서 똑바로 걷기가 힘들어진다.

  너도 엄마처럼 되면 안 되니까...


        그녀들에게서 엄마가 본 것은 자신의 미래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혼자일지도 모르는, 엄마도 없는 노년의 나였을까. 빨리 결혼하라는 말보다 이렇게 툭 던지는 걱정이, 나로서도 절대 고의는 아니었지만 여태 결혼 안 한 걸 미안하게 만든다는 것을 엄마는 알까. 어쩌면 엄마는 ‘더 늦기 전에’라고 말한 게 아니라 ‘더 늙기 전에’라고 말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다시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엄마가 느끼는 힘듦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서 나는 그냥 엄마 손만 꽉 잡았다. 갈 곳 잃은 내 마음을 읽은 엄마의 대답이었을까. 엄마도 내 손을 꽉 쥐어줬다. 나는 또 철없이 괜찮다. 아직은 괜찮다. 지금은 괜찮다. 금세 안심해버리고 말았다.     


- 헉... 개!      


        믹스견으로 추정되는 검은색의 중형 견이 주인과 함께 산책 중이었다. 나는 개를 무서워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나에게 다가오는 개를 무서워한다. 그들은 호기심에, 반가워서 다가오는 것뿐인데, 그걸 알면서도 그럴 때마다 나는 두 팔을 가슴으로 모으고 ‘엄마!’ 외치면서 ‘얼음 땡 놀이’를 혼자라도 하고 만다. 개는 우리와는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었으므로 잠시 후면 마주칠 위기 상황. 이대로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내가 꼼짝없이 개 옆을 지나가야 했다.     


        그때였다! 엄마가 내 을 잡아끌었다. 나와 개 사이를 엄마가 가로막은 것이다. 내가 ‘엄마!’를 외칠 틈도 없이 엄마가 나를 보호했다. 순간 울컥했다. 이제는 체격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되는데... 하지만 서류상이나 현실에서나 내 보호자는 여전히 엄마, 아빠였다. 그게 미안하면서도 좋았다. 아직도 딸 보호자 노릇에서 은퇴를 못한 부모님은 싫겠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이라도 나처럼 좋았으면 했다.


나는 다시 보호자의 손을 꽉, 잡고 걸었다.     


        엄마 아빠 둘이서 백신을 맞으러 가도 된다는 말에도 걱정이 놓아지지 않아서 급하게 대구를 내려갔다. 어디까지나 나도, 엄마 아빠의 보호자이니까. 주사를 맞고 삼겹살을 먹으면 좋다는 민간 처방전이 마음에 들어 우리 세 식구는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 이제 4시간 지났네. 엄마 아빠 괜찮아?

- 주사 맞은 데만 근육이 좀 아프고

   아직은 뭐 크게 모르겠다.

그래도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고 쉬라는 말을 하려는데, 엄마에게 타이밍을 뺏겼다.

- 니는 언제 맞노? 대구 내려와서 맞아라!

- 아니, 나 서울 사는데

   왜 굳이 대구에서 맞으라는 거야?

- 니만 걱정되나! 엄마 아빠는 그래도 둘인데

   니는 혼자잖아. 혼자 있다가 아프면 어떠캐!

   우리가 간호해줘야 되니까, 내려와서 맞아라!     


내 보호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엄마 아빠. 그래서 나는 좋은데... 엄마 아빠에게 미안해지는 날들은 점점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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