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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Oct 27. 2021

지금은 ‘뻔뻔한 긍정의 세계’가 나를 보호 중

        어떤 시절 속 나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늘 불안 속에 지냈다. 대체적으로 20대까지 내내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나를 무시할 이유는 너무도 많았다. 예쁘지 않다. 몸매가 좋지 않다. 패션 센스가 없다. 지방대 출신이다. 성격도 그다지 좋은 것 같지 않다. 직업이 불안정하다. 딱히 남들보다 잘하는 게 없다. 영화, 독서, 공연 등 평균 이하(!)의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이렇다 할 취미도 없다. 장롱에 처박아둘지언정 남들은 무조건 딴다는 운전면허도 없고, 고로 차도 없다. 명품을 모르고, 안다고 해도 살 여유가 없다. 내가 사는 집은 ‘오늘의 집’에 소개될 일이 절대 없을 것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공개하기도 부끄럽다. 해외여행을 간 적이 없다.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없다 등등. 한 마디로 내가 가진 것도, 가지지 못한 것도, 무시당할 이유로는 충분하다 못해 넘쳐났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스스로 무시하는 게 많아질수록,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내가 된다는 것을. 나는 내가 가진 사회적 편견, 고정관념, 자격지심으로 사람들을 평가했고, 그 평가에서 나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가장 혹독한 결과물을 받아 든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매일 낙제점을 받는 내가 너무 괴로웠다. 당연히 ‘인정’보다는 ‘부인’하는 것에 매달렸다. 나를, 내가 처한 현실을 부인하면 부인할수록 나는 점점 더 초라한 사람이 되어갔고, 행복할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까지 여겼다. 그런 점에서 그 시절 나의 불행은 타인이 아니라 99%, 내가 일으킨 ‘자발적 재난’이었다.           


         마음의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내가 받은 무시를 어떻게 해서든 만회하고자 했다. 설령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고, 앞으로 전혀 볼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래야만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에 하나라도 ‘별로인 사람’이 될 것 같으면 거짓과 웃음으로 적당히 불안을 숨겼다. 겉으로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타인의 평가에 따라 하루에도 여러 차례 스스로를 우울의 나락으로 보내는 내가, ‘진짜로’ 괜찮은 사람이 될 리는 없었다.          


        그토록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무시당하지 않을 방법 같은 건 찾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사회적 합의와 나의 생각과 모든 사람들의 기준이 같을 때만이 가능한 일. 하나라도 삐끗하면 무시는 불시에 나타났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그 사실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그런 대접을 받을 때가 있지 않은가. 결국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발버둥을 접었다. 대신 ‘내가 원하는 것’과 ‘남들이 인정하는 것’을 구분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둘을 구분하면서 내가 얼마든지 무시당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인정하는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한 나를 무시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인정하는 삶 전부를 나도 원하느냐. NO! 그저 우리는 서로의 멋으로 각자의 인생을 사는 것뿐이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내 삶에 불필요한 타인의 평가를 무시하기로 했다. 사회적 물의나 민폐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나에 대한 ‘타인의 부정적 평가’가 일면 타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순간은 도리어 현저히 줄어들었다. 설사 단순히 내 착각이 아니라 진짜 무시였다고 해도 나 스스로를 전처럼 업신여기고 도리 없이 무너지는 일도 없었다. 무시를 무시한 결과였다.     


        돌이켜보면 무시당했다고 느꼈던 순간들의 책임은 타인에게 있지 않았다. 다 나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세계가 부정적이라서. ‘그러면 안 돼’보다 ‘그래도 돼’라고 생각했더라면 그 시절 나는 분명 덜 다치고, 상처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되도록 ‘좋은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이유는 어쩌면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가 아닐까.


        남들이 보기에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괜찮지 않은 사람일 수 있다. 앞서 나열한 이유들 중에서 변한 사실도 있지만 몇 가지를 제외하면 그대로인 것들이 대부분이니까. 나는 여전히 예쁘지 않으며 오히려 나이는 그때보다 훨씬 더 먹었고, 최종 학력 업그레이드는커녕 여전히 불안정한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중이다. 집, 운전면허, 차, 명품이 없는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수준 이상의 괜찮은 사람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또다시 예전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낙제점을 받는다고 해도 ‘그래도 괜찮아. 네가 원하는 대로 잘살고 있다'라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는 ‘뻔뻔한 긍정의 세계’가 나를 보호 중이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타인을 쉽게 무시하는 사람은 그보다 더 많이 자신을 무시하게 될 사람이다. 누군가를 먼저 무시한다고 해서 자신이 무시당하지 않을 방패가 될 수는 없고, 타인을 무시하면 할수록 외려 자신만 다칠 뿐이니까. 과거의 내가 그랬고, 지금도 종종 부정의 세계에 잠식당해 버린 내가 그럴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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