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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Aug 01. 2022

뭔가를 못 하는 이유.

         브런치 알림이 왔다. 마지막 글을 올린 지 120일이 지났단다. 같은 알림을 받은 30일에도, 60일에도, 90일에도 다짐했다. 이번에는 정말 써야지. 하지만 써야지, 라는 생각만 반복적으로 할 뿐이었다. 다짐은 내게 매번 마음은 먹지만 하지는 않는 ‘청소’와 비슷한 재질이었다. 생각만 이만 번, 실행에 옮기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거나 때로는 아예 없던 일이 되곤 했다. 이런 나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동안은 쓸 게 없어도 1주일에 하나씩은 무조건 썼다. 그렇게 2 년 여의 시간 동안 길들인 습관은 하루, 이틀 미루기 시작하자 원래 없었던 일처럼 되어버렸다.      


        엄연히 따지면 글쓰기는 내 안에서 가출한 것이 아니라 퇴출당한 게 맞았다. 내가 놓아버렸으니까. 놓는 건 말을 내뱉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그러나 한번 포기한 나의 일부였던 시간들은 되찾으려고 해도 마음처럼 되질 않았다. 거짓말이다. 내가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니, 실은 마음대로 된 결과였다.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있다고 하기에는 초라한 의욕. 나에게 의욕이란 주로 벼랑 끝에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드디어 청소, 그것도 무려 대청소를 했다. 솔직히 집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게 견딜 수 없어서는 아니었다. 이제는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겨버렸다. 몇 달 전부터 물이 조금씩 새던 욕실 샤워기가 완전히 제 기능을 잃어버렸다. 교체를 위해 기사님이 방문해야 했다. 남에게 나의 공간을 허락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얼마든지 더러움을 더, 견뎠을 것이다.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인 것들은 이토록 나를 간사하게 만든다.      


        토요일을 마무리하는 나의 루틴은 꽤 오랫동안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는 것이었다. (이마저도 동 시간대 드라마 본방 사수를 위해 바뀐 지 좀 됐다.) 그날 방송 아이템은 대학생 실종 사건이었다. 조사를 위해 실종자의 자취방을 수색하는 경찰의 모습 위로 방 상태를 묘사하는 내레이션이 흘렀다. 한눈에 보기에도 깔끔하게 정돈된 방이었고, 아마도 그건 실종자의 성격과 평소 생활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때 참 어이없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어떤 이유로 지금 내 집을 경찰이 수색한다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단정 지을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시에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당장 내가 했던 건 청소가 아니었다. 청소의 빈도와 강제성에 대한 다짐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 다짐은 이내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이 이야기를 한 친구에게 했더니 그녀는 속옷에 신경 쓴다고 했다. 그게 왜,라고 물으려고 했는데 그전에 이유는 바로 나를 찾아왔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편하게 입었는데 갑자기 아파서 응급실에 간 날 대충 입은 속옷이 너무 창피했단다. 그때 나는 오늘 어떤 속옷을 입었나 떠올렸는데, 신경 쓰고 살아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그렇다면 신경을 쓰는 내 모습은, 정말 나일까. 또 다른 나일까. 아니면 내가 아닌 걸까. 문득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어쩌면 모두 노력인 것만 같았다.      


        글쓰기와 청소, 둘 다 나에게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일.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공개’라는 외나무다리가 있는 청소와는 달리 글은 언제까지고 ‘비공개’가 가능했다. 그렇다면 일단 그렇게 두자고 생각했다. 최대한 노력을 쉬고 싶었다. 쓸 거리가 없다는 당당한 핑계도 있었으므로 ‘일단’이 무려 4개월이 넘도록 내일로 미룰 수 있었다. 글을 쓰는 걸 중단하는 동안 그 시간을 대신한 건 글을 읽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면 타인의 문장에서 나를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사람은 끊임없이 뭔가를 못 하는 이유를 찾는다. 그리고 그걸 타인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킴으로써 자신의 결정에 당위를 부여한다.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중략) 많은 이가 그런 과정을 겪는 걸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못하는 이유를 찾고, 그걸로 타인을 설득시키려고 한다. 그래 놓고는 타인이 이해한다고 해주면 자신의 선택이 맞았다고 위안을 삼는다.     


프로의 장르 글쓰기 특강 중에서_     


        글자로 맞는 기분. 영락없는 나여서 그랬을 것이다. 선택이 주어지면 내가 할 수 있음에도 할 수 없는 갖은 이유를 ‘먼저’ 찾아내 그나마 있던 의욕마저도 꺾고 위안 삼는 내가 그 문장에 갇혀 있었다. 나를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는 많이도 필요 없었다. 오직 내 마음에 달린 일, 나 하나만 납득하면 되는 일이니까. 고집이 센 나였지만 나는 나에게만큼은 아주 쉽게 설득당했다. 그래서 번지르르한 변명이나 우스운 핑계조차도 너무도 쉽게 그럴듯한 이유로 인정받았다.


        매번 다양한 변명을 들이댔지만 따지고 보면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냥 하기 싫어서.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는 부끄러웠던 거다. 그럴 때면 자신이 없다는 말로 한 발도 아닌 열 발을 물러섰다. 나만 속이면 되는 거짓말은 서서히 나를 남들보다 뒤처지게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어떤 말이라도 명분이 될 수는 있었지만 거짓말이 들키고 나서 정작 내가 초라하지 않을 명분은 없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는.      


        쓰기 싫어서 브런치를 방치하는 동안에도 구독자 수는 변함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씩이라도 계속 늘었다. 분명 지난 노력에 대한 보상(!) 일 것이다. 그런데 그게 또 부끄러웠다. 지금의 나는 하기 싫어서 빈둥거릴 뿐이라서. 글을 써야겠다는 연약한 의욕이 부끄러움을 지우려 커서를 이동시켰다.


그 순간 깨달았다. 지금까지 벼랑 끝에서 내가 건져 올린 건 ‘사라진 의욕’이라 생각했지만 실은 ‘부끄러운 나’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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