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내 얘기인가?’

선배에게.

by 현진

프롤로그 – 네 맞아요, 당신 이야기.


선배, □□씨한테 전화가 왔어요. 맞아요. 제가 그 프로그램을 떠나면서 제 후임으로 왔던 그녀요. 사실 저도 지은 죄가 있어서 안 받으려고 했었는데 도망치듯 떠나온 저한테, 그것도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전화한 이유가 궁금해서 안 받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녀는 잘 지내냐고 제게 물었어요. 저는 대답 대신 미안하다고만 했고요.


프로그램의 특성상 인수인계에는 5일이 필요했어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요. 그런데 저는, 삼 일만 하고 돌연 잠수를 타버렸죠. 선배도 아시죠? 제 후임으로 온 사람이 그녀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세 번째였어요. 프로그램에 투입된 지 고작 한 달 만에 제가 그만두겠다고 말했을 때, 선배들 중 어느 누구도 저를 잡지 않았어요. 그저 예의뿐인 말이라도 고생했다는 말도 없었죠. 대신 다음의 말로 마지막 인사를 건넨 건 다름 아닌 선배였어요.

- 알겠고, 인수인계나 잘해주고 가.


솔직히 제가 그만두겠다고 말할 날만 기다린 사람 같았어요. 그런데도 섭섭하지 않았어요. 매번 당신들이 제게 말했듯 모든 게 다 제 능력이 부족해서라는 걸 저 역시도 인정했고, 받아들였으니까요. 마지막에야 제가 잠수를 탔지만 앞의 두 명에게는 제가 당했죠. 그들이 떠나면서 남긴 문자는 같았어요. 요일마다 제가 해왔던 업무를 자신들은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저는 제가 했던 모든 업무가 당연한 건 줄로만 알았어요. 그래서 연달아 두 명이 잠수를 탈 정도로 버거운 일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어요. 그럴 만했죠. 저는 전임자도 없이 바로 일을 시작했으니까요. 두 번째 잠수를 당했던 날, 선배가 저한테 했던 말 기억나세요?


- 아무래도 그냥 네 자리인가 봐.

네가 계속해라. 알았지?


여전히 상냥하지는 않은 말투. 그건 분명 타이르는 것이 아닌 명령에 가까운 말투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만약 처음 그만둔다고 했을 때 이 말을 들었다면 과연 내가 마음을 다잡아 돌렸을까... 아니었을 거예요. 선배의 그 말을 듣자마자 어이가 없었던 걸 보면 말이에요. 내내 ‘이제 와서?’라는 생각만 들더군요. 저는 망설임 없이 되받아쳤어요.


- 아니요. 그만두겠습니다.


이미 한 달 전에 했던 제 포기 선언을 단숨에 받아들였던 선배였어요. 저는 그때와 똑같은 대답을 했을 뿐인데 제 말의 무엇이 선배의 심기를 건드렸던 건지 저는 지금도 모르겠어요. 대답이 끝나자마자 잔뜩 화가 난 선배가 분노를 가득 담아 쏘았어요.

- 그래? 알았어. 너 여기서 나가면

이 바닥에 내가 다시는 발 못 붙이게 할 테니까

자신 있으면 한번 나가 봐.

딱히 자신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저 질책받고, 무시당하고, 투명 인간 취급받고, 같은 공간에 제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눈치 보였던 하루하루가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곤 죽어야 이 고통이 끝날 것 같다는 것뿐이었어요. 선배가 엄포를 놓았듯 꿈을 포기함으로써 살 수 있다면, 정말 그런 거라면, 다만 저는 살고 싶었어요. 꿈을 이런 식으로 포기한다는 게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에요. 근데 도무지 내일을 또 버텨낼 마음이 생기지 않더군요. 그렇게 저는 제가 죽지 않기 위해서 제 꿈을 죽이기로 결심했어요.

저도 웃긴 게, 저를 대신할 사람은 꼭 구해 놓고 싶었던 걸 보면 아주 무책임한 사람까지는 되고 싶지는 않았나 봐요. 어쩌면 그게 당신들에게 갖추는 제 마지막 도리라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랬던 저의 마지막 희망이 그녀였어요. 전처럼 일주일 동안 제 책임을 다하면 그녀마저도 도망칠 것 같았어요. 이번에는 제가 먼저 사라져야겠다 다짐했고. 실행에 옮겼고. 마침내 인수인계 시작 한 달 만에 탈출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잘 지내냐는 그녀의 물음에 차마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어요. 내가 살기 위해 그녀에게 어떤 고통을 준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어요. 현진 씨의 사정을 당시에는 잘 알지 못해 원망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전화 통화라는 게 다행이었어요. 눈물이 왈칵 나왔거든요. 당신들과의 시간을 이해받을 수 있을 줄 몰랐던 거죠. 그것도 무책임하게 나의 불행을 떠넘긴 그녀한테서. 아무도 제가 힘들다는 걸 인정해주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못 해내는 거라고만 했잖아요. 저라서 못하는 거라고.


전화를 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대요. 그래도 혹시나 현진 씨라면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용기 내서 전화했다고. 쉽지 않았을 텐데 전화받아줘서 고맙다고도 했고요. 그녀가 전화 한 통에 용기까지 장착해서 굳이 왜 저에게 전화했는지 짐작하시나요?


- 실은 제가 지금 좋은 제안을 받아서

그만두려고 하는데,

선배가 그만두면 이 바닥에

다시는 발 못 붙이게 만들겠다고 하는데

어떡하면 좋아요?


선배 레퍼토리는 여전하더군요. 그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후배들을 협박(!)했던 걸까 하는 생각에 울컥했던 눈물이 쏙 들어가고, 기가 막힌 한숨이 터져 나왔어요. 저는 저라서 그런 소리를 듣는 건 줄 알았어요. 다 내가 못나고, 내가 잘못한 거라서.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기억하세요? 저 매일 눈물 바람이었잖아요. 이런저런 실수로 혼나고, 그런 저한테 속상해서 울고. 솔직히 억울하고 서러워서 눈물 버튼이 자동으로 눌러지는 날이 더 많았어요.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들도 있는 사무실에서 눈물을 참지 못한 건 제 잘못이 맞아요.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팀 사람들이 저를 위로해 줬잖아요. 그러니 선배 입장이 얼마나 곤란했겠어요. 그렇다고 면전에 대고 ‘또 우냐, 지겹다’고 핀잔줄 것까지는 없었는데... 그래도 고마워요. 덕분에 눈물샘이 마른 건지, 다른 팀으로 옮겨서는 울지 않게 됐거든요. 칭찬도 제법 많이 들었어요. 이런 말을 들어도 되나 싶을 만큼요. 참, 신기해요. 저라는 사람은 그대로이고, 단지 팀만 바뀌었을 뿐인데 왜 그때는 아니었던 제가, 지금은 맞는 사람이 된 걸까요? 왜 그런 건지, 혹시 선배는 짚이는 게 있으세요?


사실 일도 못 하면서 울기만 하는 제가 지겹다는 말은 그래도 일말의 이해는 됐어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울어댔으니 얼마나 보기 싫었겠어요. 근데 그녀한테는 이렇게 말했던데요?


- 너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아이야.

어쩜 무슨 말을 해도 울지를 않니?

너 진짜 독하다 독해!!!


독하다는 이유로 치를 떨 듯 그녀를 대했던 선배가 정작 그녀가 그만두겠다는데, 왜 저주를 퍼부으면서 못 그만두게 하려는지. 그 깊은 속내는 알다가도 모르는 게 아니라, 그냥 모르겠어요. 선배, 왜 그러는 거예요? 최종적으로 그녀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저보다 선배가 더 잘 알 테니까,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선배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정말 이 바닥에 발 안 붙일 각오를 했는데... 좀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터라 지금은 이게 궁금하네요. 생각보다 선배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던 걸까요. 아니면 이 바닥이 보기보다 너무 넓었던 걸까요. 그것도 아니면 꿈에 대한 제 미련이 너무 컸던 걸까요?


어쨌든 선배, 저는 ‘생존자’로 여전히 제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물론 잘 알고 있어요. 딱히 궁금하지 않은 안부라는 거. 하지만 저는 꼭 한 번은 말해주고 싶었어요. 제가 어떤 시간을 견뎠는지 말이에요.


혹시 ‘이 이야기가 내 얘기인가?’라는 생각이 드나요? 네 맞아요. 당신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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