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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현주 Feb 09. 2018

비빌 언덕 만드는 기술

#일상기술연구소


나는 범서파 조직원이다. 조직원들은 제각각의 자리에서 암약하다가, 다른 조직원을 우연히 발견하면 현장을 포착해 ‘인증샷’을 남긴다. 가끔씩 조직원 두엇이 한자리에서 함께 활동할 때도 있지만, 범서파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활동은 아니다. 그렇게 우연히 다른 조직원과 접속하는 일을 우리는 유닛 활동이라 부른다. 가끔씩 누군가 긴급히 소집을 외치면 호출 장소로 스멀스멀 모이기도 한다.


범서파는 ‘범서대문구 모임’을 줄인 이름으로, 서대문구와 그에 인접한 마포구와 은평구에 사는 20대 중반부터 40대 초반까지의 여성 예닐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여섯은 같은 학교를 다닌 것도 같은 회사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여성이라는 것, 그리고 돈벌이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명시적으로 고려하는, 느슨히 일컬어 소셜 섹터라고 불리는 영역에서 일한다는 점이다. 몇몇은 모임이 생기기 전부터 알았고, 몇몇은 모임을 통해 처음 만나기도 했다. 


대단한 모임처럼 말했지만, 예닐곱이 전부 모이는 건 두 달에 한번 될까 말까이고, 날짜를 잡으려면 한 달 전에는 시도해야 한다. 긴급 소집을 외친대도 시간이 가능한 두셋이 모여 줄곧 수다를 떨다 헤어지는 게 전부다.그런데 이 모임이 나에겐 대나무숲이다. 일하는 여자로서 부딪히는, 어디 가서 말하기 뭣한 소소한 짜증부터 심오한 문제의식을 별 검열 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장소다. 섹터에 대한 애정 어린 불평불만도 이곳에서 얘기하면 안전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임에서 나는 동네 친구를 만난다! 동네라기엔 차 타고 15분이긴 하지만, 넓디넓은 서울에서 뜻 맞고 맘 맞는 친구를 15분 만에 소집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위안이다. 실은 현실 접속보다는 카톡 수다가 훨씬 빈번하지만, 직업인으로서의 짜증과 피로를 다음날로 넘기지 않고 아침을 맞는 데는 범서파 카톡방의 존재가 큰 역할을 한다. 공감해줄 이들이 손 닿는 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열에 일고여덟 번은 굳이 곤란함을 카톡방에 쏟아내지 않고도 그 가능성을 떠올리면서 혼자 비죽 웃음을 짓고 털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사적 지대와 공적 지대 사이에서 동료들을 조직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일과 삶을 가로지르며 다종다양한 대화를 이해관계의 얽힘 없이 안전하게 나눌 수 있는 자리, 나는 그런 자리 덕에 다음날 다시 우아한 얼굴로 일터에 간다. 꼭 범서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816098.html#csidx118d738711a358d9a850ed6940d61f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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