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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현주 Oct 21. 2019

썸, 어장, 잠수, 고스팅 ⠀



이른바 할로윈 시즌이 다가오니 Ghost 가 여기저기서 출몰한다. 최근 몇년간 고스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고스팅 비슷한 경험도 많이 했던 것 같고 말이다. 지금 와서 뒤돌아보면, 고스팅이라는 게 워낙 2000년대 중반 이후 급증한 새로운 관계적 현상이기에 사전 지식 없이 좀 많이 맘 고생을 했던 것 같다.

사실 한국에서는 고스팅이라는 단어보다는 "썸" 혹은 "썸탄다"라는 신조어가 2000년대 중반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중문화 뿐 아니라 실제 관계적인 상황들에서도 이제 "썸"은 어떤 주류적인 패턴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그런데 이 "썸" 이라는 단어와 자주 동반되는 신조어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어장"이라는 단어이다. 이 관계가 썸인지, 어장인지에 대한 고민과 고충들은 관심의 중점이 되었다.

하지만 계속 이런 단어 사용에 의문이 들었다. 썸이나 어장이라는 단어가 적절하게 현상을 표현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리고 이런 인식 패턴들이 너무 많은 심리적 고통과 관계적 상처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동시에 "고스팅" 이라는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관계적 학대를 의미하는 "가스라이팅"도 연관해서 볼 수 있지만 이는 예전부터 있어왔던 것 같고, "고스팅"은 조금 더 현대적인 관계적 역학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고스팅"은 urban dictionary 에 등재된 단어이기도 하다. 일차적 의미는 어떤 설명도 없이 갑자기 모든 연락을 끊고 잠수타는 행위를 뜻한다. 하지만 고스팅은 좀 더 폭넓게 보자면 상대를 보이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처럼 대하는 모든 태도와 행위를 포괄한다. 그렇지만 "썸"이란 영어 단어는 없다. 그냥 "something between us" 이런 식으로 어떤 직관적 느낌이나 느슨한 관계를 표현하는 정도라고 해야할까.

요즘처럼 소셜 미디어에서 차단이 난무하는 시대에 고스팅은 일상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고스팅을 단순히 언팔로우나 차단 정도로만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고스팅에는 명백한 권력 관계가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이 권력 관계라는 것은 절대적이라기 보다는 상대적인데 둘 사이의 어떤 정보, 인맥, 스킬 등 여러 의미에서의 자원의 차이로 파악 가능하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어떤 감정적 교류가 있지만 이는 사실 언제나 고스팅을 동반하는 종류의 매우 불안정한 것이다.

고스팅의 상황은 보통 Newcomer, 그러니까 어떤 새로운 상황에 처음 진입한 신입에게 많이 발생한다. 이를테면 오디션 프로그램과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인데 참여자들은 스캔 당하고 언제든지 탈락의 위기에 마주한다. 예의나 매너가 전혀 없는 종류의 갑작스런 거절을 혼자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정보나 대처 스킬이 부족한 상황에서 고스팅을 당할 경우 이런 심리적 고통은 상당하고 오랜 기간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직종이나 취미를 가지고 있다면 이런 고스팅은 보다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

사실 모든 이별은 본질적으로 고스팅 (혹은 관계에서 죽임을 당하기)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렇지만 요즈음의 고스팅이란 관계의 진실은 저 너머에 있고 명확한 것은 오직 이별, 그러니까 고스팅 뿐이다. "사랑보다 이별"의 시대에 존재하는 관계들이 바로 썸, 어장, 잠수, 고스팅이지 않은가 싶다.

이런 관계들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지 않다고들 흔히 말하는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고스팅은 가해-피해 관계가 비교적 명확한 상황에서 발생한다. 또는 이러한 행동들이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고 보는 편이다. 고스팅은 매우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이다. 고스팅 상황을 인지한 피해자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많지 않다. 이미 불리한 상황 속에서 시작되어 버린, 정의하기 힘든 관계이기 때문이다.

다만 고스팅 상황에 대해 평소 인지하고 있는 것은 적정한 거리 설정에 꽤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적정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보 등의 불균등성이 나아지면 이런 고스팅을 방지하는게 조금은 수월해진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단순히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하는 것 전부가 고스팅은 아니다. 오히려 고스팅 상황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체 고스팅을 선택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고스트라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 현실을 인정하며 대처하려는 방식일 때도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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