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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Jul 04. 2016

<아가씨> 찢고 싶게 어여쁜 그림책

강박적 탐미는 핍진성을 지우고 타인의 이상을 덧칠한다

영화 <아가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두 여성의 연대와 사랑을 그린 영화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의 갈등을 그린 예고편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 원작을 아끼는 지인은 "예고편만 보면 하정우가 아가씨인 줄 알겠어"라고 농담을 던질 정도였는데, 이는 상업적 수익을 위한 안전장치일 것이다. 사실 스릴러보다는 로맨스에 가깝다.


숙희는 히데코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아가씨> 스틸.


  숙희(김태리)는 희대의 도둑이었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장물아비 손에서 자란 소매치기다. 그녀는 평생 저택에만 갇혀있었던 '아가씨' 히데코(김민희)의 재산을 빼앗자는 백작(하정우)의 제안을 받아들여 히데코의 하녀가 된다. 히데코가 백작을 사랑하게 만들어 두 사람을 결혼시키는 것이 그녀의 임무. 그러나 숙희는 히데코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본래 목적과 타오르는 정념 사이에서 갈등한다.

  

  코우즈키(조진웅)의 저택은 여러 가치가 혼란스럽게 뒤엉킨 상황을 나타내는 듯하다. 영국과 일본의 건축양식은 제국주의를 선망하는, '일본 남성'이 되고자 하는 '한국 남성'의 욕망을 보여준다. 코우즈키와 백작 모두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여성을 수단으로 삼는다. 반면 '여성들'은 민족성이나 국가 이념을 지운 채 개인 그 자체로 존재한다. 서로를 원하고 사랑하면서 처음의 물욕은 안중에도 없다.


왜곡된 타인의 욕망을 낭독하는 히데코. <아가씨> 스틸.


  남성과 여성 인물들의 명확한 대비는 빛에서도 드러난다. 책을 읽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전기까지 끌어다가' 켜둔 조명은 툭하면 정전 탓에 꺼져버린다. 깜빡이는 빛은 권력적 시선이며 위태롭고 왜곡된 남성의 욕망이다. 낭독회 중 정전이 됐을 때, 히데코는 시선의 객체에서 벗어나 잠깐의 자유를 얻는다. 그녀는 책을 읽는 대신 눈을 감고 다음 대목을 읊는다. 숙희를 떠올리며 자신의 욕망을 뱉어낸 것이다. 여성의 욕망은 달로 나타난다. 히데코와 숙희가 행복을 찾아 떠나고 나서야 구름에 가렸던 달이 훤히 빛난다.


  코우즈키의 그림책은 한 편의 영화 같다. 직접 목을 조르고 목각인형에 묶여 체위를 설명하는 히데코와 그녀를 바라보는 신사들의 음흉한 시선은 카메라가 여성을 대상화했던 방식과 그를 관람했던 관객, 즉 기존의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감독은 1부의 요소들을 2부에서 전복시키며 백작(하정우)을, 관객을, 앞서의 관념을 기만한다. 이성애·여성의 속물성·처녀막·남성 중심의 내러티브를 보란 듯이 부숴버린다. 백작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거짓 신음하는 히데코의 표정은 허황된 프레임에 대한 조소이자 자기반성이다.


숙희의 시점에서 히데코를 탐한다. <아가씨> 스틸.


  영화는 욕망의 주체와 객체 모두를 여성으로 삼으며 남성을 소외시킨다. 카메라는 히데코의 시점에서 숙희를, 숙희의 시점에서 히데코를 탐한다. 계속 회자되고 있는 골무 장면 외에도 몸을 조여 왔던 코르셋과 브라를 천천히 풀어나가는 손가락, 커다란 사탕을 굴리고 녹이는 혀와 입술 등 영화 전반에 깔린 손과 입의 성애는 노골적이면서도 은근하게 오감을 자극한다. 두 번에 걸쳐 등장하는 정사 장면은 회화 작품을 보는 듯하다. 정말 '그림같이' 아름답다. 공간 배경부터 인물의 자세까지 강박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의상과 소품 하나하나가 미적 욕구를 충족한다.


  그러나 <아가씨> 또한 타인의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권력관계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겠지만 '너 한 번, 나 한 번'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두 사람의 모습은 교재 속 삽화 같다.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이 화려하고 아름답게만 그려질수록 입안이 씁쓸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우즈키의 그림 속 도구가 등장하듯, 왜곡된 프레임을 반성하는 영화가 다른 이상적 프레임을 가져다 씌운다. 장갑을 벗어던진 순간 평생 옭아맸던 굴레가 사라지는 줄 알았건만, 또 다른 그림책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상업영화에서 두 여성의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방법은 (현실이 아닌) 그림이 되는 수밖에 없는 것인지, 남성적 시선의 한계인지는 고민해볼 일이다.


신사들은 파멸되지 않았다. <아가씨> 스틸.


  매주 낭독회에 나와 성적 흥분을 즐겼던 신사들은 파멸되지 않았다. 그들은 히데코와 숙희가 떠난 땅, 이곳에서 여전히 다른 희생자들을 낳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을 가시화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페미니즘적으로 유의미하다. 여성을 기존과 다르게 그리며 중요한 질문거리를 던지고 있으니. '좋은' 영화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남성적 시선을 전복하려 애쓴 감독의 과감한 시도는 앞으로 등장할 영화들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박찬욱 딸 있다더니 너무 유해진 것 아니냐'는 불만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는 퇴보나 배신을 한 것이 아니라 반성과 변화를 통해 성장했을 뿐이다.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 기어이 웃게 만드는 그의 가학적인 취향은 여전하다. 밧줄에 목을 매고 작두에 손가락이 잘려나가도 다음 쇼트를 보면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달밤 짤랑이는 방울 소리에 다시금 생각한다. 그가 성공한 변태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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