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서가 킨더(유치원)에 다니면서 자연스레 학교에 자주 가게 된다. 담임과 상담하러 가는 건 아니고, 오후에 자전거 타고 학교 놀이터로 놀러 가는 것이다. 놀이터에 갈 때마다 언제나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국 아이들 노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어느 날은 놀이터에 도착하니 초등학생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가 그네 위에서 균형 잡기 대결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네 위라 함은 그네가 매달려 있는 철봉의 상단 바를 말한다. 나는 깜짝 놀라 위험하니 내려오라고 할 요량으로 그네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그네 근처에 그 아이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네 바로 아래에 아이들의 부모들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안 주고 대화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준서가 옆에서 큰 소리로 “저 형아 누나 저렇게 놀면 위험한데”를 연신 반복했지만 한국어를 모르는 그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 이곳에 동춘서커스의 후예들이 살 수도 있을 거라는 소수점 아래 희박한 확률에 베팅을 하며, 그 근처 멀지 않은 곳에서 그 광경을 계속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들의 대화가 끝났고 그들은 아이들에게 내려오라는 손짓을 했다. 아이들은 봉을 타고 내려와 부모와 함께 집으로 갔다. 넌 위험하게 왜 거기 올라가서 노니 같은 정겨운 대화는 없어 보였다. 쟤네 볼쇼이인가.
또 다른 날 학교에 갔는데 학교 옆 개울에서 노는 소리가 들렸다. 준서가 워낙 물을 좋아하는 터라 거기에 같이 가보기로 했다. 가서 보니 몇몇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온몸이 진흙투성이에 옷도 엉망이었다. 나는 속으로 너희는 엄마 오면 제대로 등짝 스매싱이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아이들의 엄마로 보이는 이들이 도착했다. 그런데 반응이 영 싱거웠다. 다 놀았니? 집에 가자. 그게 끝이었다. 한국이라면 왜 지저분한 곳에서 노니, 꼴은 또 그게 뭐니, 당장 나와, 로 이어지는 3단 콤보가 바로 들어가 줄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 집에 가서 혼나나 라고 생각해봤지만 진흙 투성이 맨발로 물 뚝뚝 흘리며 그냥 집에 가는 걸 보면 딱히 그럴 것 같지도 않다. 혹시 쟤가 정글북의 모글리는 아니겠지?
또 한 날은 준서와 함께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있었다. 그 미끄럼틀은 두 가지 방법으로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는데, 하나는 계단을 이용해 올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전자는 쉽고 후자는 좀 난이도가 있다. 조심성이 많은 준서는 늘 쉬운 계단을 고집했고 난 항상 준서에게 사다리를 권했다. 그날도 여지없이 그걸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눈 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어떤 아이가 쪽쪽이(공갈 젖꼭지)를 입에 문채로 포대기를 한 손에 잡고 사다리를 오르고 있었다. 딱 봐도 만 세 살이 안되어 보이는 매우 어린아이였다. 그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이는 이쪽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다른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히려 애가 타는 쪽은 우리였다. 우리는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그 아이의 믿기 힘든 등반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결국 등반에 성공했고 당당하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왔다. 그러고 우리에게 와서 알 수 없는 옹알이를 좀 하다가 엄마한테 아장아장 걸어갔다. 그 엄마는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 상황을 같이 지켜본 준서는 나에게 "아빠, 아기가 사다리를 오르네"라고 말한 뒤 자기도 사다리로 올라가 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아빠, 나 뒤에서 잡아주세요"라고 했다. 순간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등과 엉덩이를 잡아주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도 놀이터에서 자주 준서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한국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어떻게 노는 줄 잘 알고 있다. 한국 아이들 곁에는 항상 부모가 있다. 특히 그 애가 미취학 아동이라면 대부분의 부모가 6ft 이내에 서서 아이를 지켜본다. 지저분한 거 있으면 못 만지게 제지하고, 위험한 곳은 애초에 못 오르게 하며, 다른 아이들과 부딪히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한다. “뛰지 말고”, “거긴 안 돼”, “손대지 마”, “친구 먼저 하고 있잖아” 등이 항상 입에 붙어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한 제지들이 부모의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미국 아이들 노는 걸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나무에 올라가 위험하게 놀아도, 집으로 가는 아스팔트 길을 맨발로 다녀도, 물을 뒤집어쓰고 동네를 젖은 채 돌아다녀도 부모는 그저 바라만 볼뿐 특별하게 제지하는 법이 없다. 그대로 둔다. 아이가 넘어질까, 위험하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하는 부모 중 하나였던 나는 이런 미국 아이들의 노는 모습에 많은 내적 갈등을 느끼는 중이다.
우리는 과보호인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