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 준서라는 이름의 아이는 집안에서 제일 먼저 태어난 아이여서 양가의 이쁨을 독차지했었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아내는 출산 후 육아휴직을 시작했다. 첫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여느 엄마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아내는 경남 교육청 소속이었다. 우리는 2013년 결혼 후부터 아내의 경기도 전입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노력이라고 해봐야 1년에 한 번 교육청에 인사교류 신청하는 것뿐이었다. 경기도에서 경남으로 교류 신청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하는 기대와 함께.
그러다 정말 운 좋게 2016년 말 경기도 전입에 성공하였다.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아내가 2017년부터 학교에 나가야 했다. 전입 후 바로 휴직은 민폐일뿐더러 해서는 안될 일이라고 둘 다 생각했기에 무조건 출근하기로 하였다. 다만 돌 지난 첫째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겨야만 했다.
아내와 나는 걱정했다. 장모님은 현직에 계셨기에 대전에 계신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평일에 올라오셔서 손주 좀 봐주시면 어떠시겠냐고.
다행히 좋다고 하셨고, 2017년 2월부터 집에 함께 계시며 아이를 봐주셨다.
아내의 경기도 최초 발령지는 가평이었다. 가평군 설악면에 있는 미원초등학교 분교. 판교 집에서 편도 63km였고 차로만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왕복 평균 2시간 30분, 오래 걸리면 3시간도 넘게 걸리는 꽤 긴 운전이었다. 당시 출근 기념으로 아내에게 새 차를 사줬는데, 1년 후에 마일리지가 20,000km를 넘어있었다.
덕분에 어머니는 7시 출근 6시 퇴근하는 아내의 빈자리를 늘 메우셔야 했다. 아이만 오롯이 보실 수 있도록 다른 집안일은 우리 부부가 도맡아 했지만, 그럼에도 동네에 친구 하나 없이 아이만 보는 일이 쉽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아내는 늘 미안해했고 어머니는 늘 괜찮다고 하셨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머니는 장손이라고 첫째 아이를 참 예뻐하셨다. 아들인 나를 다시 키우는 것 같다며 재미있어 하셨다. 덕분에 두 돌 되기 한참 전에 아이는 기저귀를 떼었고 다른 아이들보다 발육도 좋았다. 책도 많이 읽어주시고 놀이도 같이 해주셔서 행동발달도 빨랐던 것 같다.
그렇게 5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아내가 나에게 읽어보라며 캡처된 사진을 보내주었다. 판교맘 카페 글이었다.
보는 순간 눈물이 났다. 세 줄 읽고 우리 아이인 줄 알았고, 곧 이어진 내용들이 어머니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 캡처 글을 핸드폰에 저장해 두었고, 지금도 가끔 꺼내 읽어보곤 한다. 원글부터 아내의 댓글, 그리고 다른 댓글까지 전부 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항상 마음이 울컥한다.
아이가 아팠던 그날이 떠오르고, 아내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아침에 아이를 꼭 안아주던 모습도 눈에 생생하다. 걱정 말라며 운전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모습까지 생생하다.
나 역시 그렇게 자랐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어머니는 늘 아이에게 진심이었고 많은 사랑을 주셨다.
그렇게 1년간 아이를 봐주신 어머니는 아이가 2018년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게 된 후로는 다시 대전으로 내려가셨다. 그러면서 가끔 첫째 아이 키우던 때 이야기를 지금도 하신다. 현재는 우리가 잠시 미국에 거주하기에, 주말에 영상통화하시면 항상 첫째를 많이 그리워하신다.
나중에 아이가 좀 크면 이 글을 아이에게 넘겨주려 한다. 할머니에게 받은 사랑 잘 기억해서 남들에게 더 많이 돌려주는 착한 사람 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