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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민서패밀리 May 03. 2022

61. 아내가 사라졌다.


아내가 사라졌다.


정확히는 토요일 아침 10시, 그녀가 사라졌다.


거실에는 2세 송민서, 6세 송준서, 그리고 나 그렇게 셋 밖에 없었다. 송씨만 두고 설씨인 아내가 사라졌다.


뭘 해야 하지, 머릿 속이 까매졌다. 우선, 오늘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일단 오후 3시에는 준서 축구시합이 있었다. 헤드코치인 Trevor가 코로나 격리기간인 관계로 내가 코치일을 맡아야만 했다. 하지만 몹시 샤이 shy 한 민서가 내가 코칭하는 사이 혼자 가만있을리 만무했다. 민서를 포대기에 업고서라도 코칭을 해야하나, 대략 난감했다. 


그런데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를 확인해보니 오후 2시부터 천둥번개 동반한 비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축구시합은 취소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늘은 송씨패밀리를 버리지 않는 듯 보였다.


축구 다음은 식사 문제였다. 아내 없이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일단 점심은 준서가 며칠 전부터 노래를 부르던 맥도날드 해피밀로 해결하기로 했다. 요즘 소닉 피규어를 선물로 주고 있어 아이들 사이에 인기였다. 


아이들을 태우고 집 근처 맥도날드로 향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난 마음 속으로 계속 기우제를 지내고 있었다. 축구 잔디 흠뻑 젖게 더 쏟아져라. 


맥도날드 드라이브쓰루에는 차들이 제법 많았다. 꽤 오랜 시간 기다려 두 손 가득 해피밀과 햄버거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 셋은 식탁에 모여 앉아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 민서 낮잠을 재우려고 하는데 아이가 통 잠을 자지 않았다. 보통 오후 1시 전후가 낮잠타임인데 오늘은 엄마가 없어서인지 아이가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낮잠을 포기한채 셋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장난감 놀이를 했다. 


그.런.데 창밖에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오마이. 심지어 오후 2시가 되자 해가 뜨기 시작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우리는 축구하러 가야만 했다. 날씨예측은 천조국 기상청도 어쩔 수 없어 보였다. 


준서, 민서를 차에 태우고 무거운 마음으로 축구장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에도 비가 오기를 바랬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민서를 품에 안은채 무거운 마음으로 잔디밭을 서성였다. 


그 때 마침 같은 팀 Luther 아빠 Jerry와 Tessa 아빠 Ryan 이 경기장에 도착했다. 나는 민서를 안고 가서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사정을 설명했다. 그들은 임시 편부모가정의 어려움을 이해해주었고 흔쾌히 나대신 코치직을 해주기로 하였다.


둘의 도움 덕에 우리 팀은 무사히 경기를 마칠 수 있었다. 준서는 세 경기 만에 리그 첫 골을 신고하기도 하였다. 경기가 끝난 후 나는 Jerry와 Ryan에게 여러 차례 고마움을 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근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오후 4:50이 되자 동네에 사이렌이 울렸다. 위이잉 하는 큰 소리에 민서가 놀라 울기 시작했다. 날씨 어플을 보니 바로 윗 동네에 시속 60마일 토네이도가 지나가고 있었다. 토네이도 경보였다. 


우리 동네에도 곧 천둥번개와 함께 엄청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리 셋은 거실에 경건히 앉아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무가 미친 사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제발 우리집 안날라가게 해주세요, 라고 속으로 빌었다. 다행히 5시가 좀 넘어가자 바람이 잦아들었다. 아내 없는 하루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이제 저녁을 먹어야 했다. 냉장고에는 아내가 해놓은 국과 반찬이 있었다. 뭇국을 데워 민서에게 주고 준서와 나는 오렌지치킨을 만들어 먹었다. 민서는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이제 민서를 재워야 하는 가장 큰 과제가 남아있었다. 민서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엄마랑만 잔 아이였다. 내가 농으로 "오늘은 아빠랑 같이 잘까?" 해도 대답은 언제나 "노 No" 였다. 진짜 영어로 말한다. 


이런 민서를 내가 재워야만 했다. 걱정이 앞섰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저녁 7시가 되었다. 나란히 셋이 소파에 앉아있는데 민서가 옆에서 졸고 있었다. 저녁도 많이 먹었겠다 거기에 낮잠까지 생략한 것이 효과를 보는 듯 했다. 나는 조용히 민서를 안았다. 깨면 큰 일이었다. 나는 모든 신경을 팔에 집중하여 민서를 무중력상태로 만들었고 침대에 누이는데까지 성공했다. 민서는 그대로  잠에 들었다. 만세였다. 


저녁 8시가 되자 준서도 졸리다고 했다. 한글책과 영어책을 한 권씩 읽고 양치를 한 뒤 침대에 누웠다. 내 왼쪽에는 준서, 오른쪽에는 민서가 누워있었다. 아내가 집에 없었지만 성공적으로 하루를 마칠 수 있었다.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나 역시 금방 잠에 들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꿈 속에서 나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경쾌한 물소리가 들렸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강을 한참 지나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아빠 아빠!" 민서 목소리였다. 민서가 여기 왜?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실제로 민서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민서야 더 자야지, 하면서 토닥토닥 하는데 민서 몸이 너무 차가웠다. 애가 왜 이렇게 차지 생각하는 순간 난 깨달았다. 민서가 일찍 잔다고 좋아하는 사이 밤기저귀 해야하는 걸 까먹은 것이다. 민서는 오줌에 온몸이 젖어있었다. 옆에 있던 나 역시.. 꿈에서 건넌 아름다운 강은 사실 민서 오줌이 넘쳐 흐르는...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잠결에 일어나 민서 옷을 갈아입혔다. 그리고 옆침대로 모두 자리를 옮겼다. 깜깜한 새벽 그렇게 세 명의 송씨는 좀비처럼 침대를 옮긴채 또 잠에 들었다. 


아침이 되자 준서와 민서가 나를 깨웠다. 민서는 Dora the explorer 만화를 틀어달라고 했고 준서는 배가 고프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을 챙겨주고 난 뒤 어제 민서가 오줌싼 침대보를 벗기고 이불을 분리하여 세탁기에 넣었다. 


물론 오줌에 젖기는 했지만 그래도 안전하게 잘 잤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위험하지 않게 보호하는 것이 부모의 제일 책무이니 말이다. 그렇게 뿌듯해하며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두둥.. 열쇠가 꽂혀 있었다. 


어제 준서 축구 끝나고 집에 들어오는데 갑자기 민서가 쉬 마렵다고 해서 헐레벌떡 들어오느라 열쇠 꽂아놓은 걸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도둑 프리패스각이었다. 다 털릴 뻔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참 쉬운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사라진지 29시간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준서와 민서는 아빠를 내팽개친 채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나는 왠지모를 안도감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모든 일을 실수 없이 행하는 아내라는 이름의 당신이라는 존재는 ㄷ ㄷ ㄷ


FYI. 아내는 준서 친구 (미국) 엄마들 세 명과 함께 lake house로 놀러 다녀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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