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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민서패밀리 Dec 14. 2023

투표에서의 점화효과

priming effect



1980년대 심리학자들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어떤 단어를 보았을 때 그것과 연관된 많은 단어 중에 어떤 단어가 쉽게 떠오르는지는 그때그때 상황마다 다르고,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측정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사람들에게 "SO(  )P" 에서 빈칸을 채워 단어를 완성하라고 하면 보통 떠오르는 단어가 'SOAP(비누)' 나 'SOUP(수프)' 일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SOAP' 먼저 떠오르고 또 어떤 사람들은 'SOUP'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사람들마다 뇌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니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런데, 이 중 단어 문제를 내기 전에 'EAT(먹다)'라는 단어를 보았거나 들은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SOAP(비누)' 보다는 'SOUP(수프)' 란 단어를 떠올리기 쉽다는 것이다. 반면에 단어 문제를 내기 전에 'SHOWER(씻다)' 라는 단어를 본 사람이라면 반대로 'SOAP(비누)' 라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일련의 현상을 "점화효과(priming effect)"라고 정의하였는데, 하나의 단어(생각)가 다른 단어에 대한 생각을 점화(유발)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점화효과 연구 중에는 노인을 상기시키면 걸음이 느려진다와 같은 행동 관련 연구도 있다. 




이러한 점화효과를 투표에 대입해보자. 


우리는 대개 투표를 다수의 정책에 대해 스스로 비교 평가하여 내 의사를 결정하는 의도적 행위로 본다. 따라서 정책과 무관한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A정책과 B정책을 투표에 부친다면 선거인은 두 정책을 비교 분석하여 합리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2000년 애리조나 주 선거에서 학교 재정지원 안건(학교에 대한 재정을 증가하는 안건)이 투표에 부쳐졌다. 정확히는 주 소비세율을 5%에서 5.6%로 인상하고 그로 인한 추가 세수입을 학교 재정지원에 쓰는 제안이었다. 따라서 투표의 핵심은 주 소비세율 인상에 찬성하는지, 그 증가율이 적정한지, 현재 학교 재정지원 증가가 필요한지 여부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선거인은 이러한 요건들을 고려하여 자발적 의사에 따라 찬성 또는 반대를 선택하여 투표를 하리라고 예상되었다.


하지만 투표 유형을 다각도로 분석해 보니, 투표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의외의 요인이 존재하였다. 바로 선거인이 투표하는 "투표소의 위치"였다. 투표소가 학교 안에 설치된 경우에는 학교 밖 다른 장소에 설치된 경우보다 학교 재정지원 안건에 찬성한 비율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학교에 직접 방문하여 학교 현장에서 직접 투표한 경우에는 학교 재정이 증가할 필요성이 있다는 투표 안을 선택할 확률이 더 높았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점화효과(priming effect)" 사례였다. 


그런가 하면 다른 실험에서는 사람들에게 교실 또는 사물함, 학교상태 사진만 보여줘도 학교 재정 지원안에 찬성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이는 해당 사진들이 학교 재정의 열악하다는 생각을 점화시켜 학교 재정지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떠오르게 만드는 전형적인 점화효과의 사례가 되는 것이다.


사실 점화효과는 선거운동에 있어서 활용도가 높을 수 있다. 길거리의 현수막, 정당색깔(빨강, 파랑, 노랑 등) 점퍼, 명함 등을 통해 유권자가 본인을 지지하도록 점화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현수막의 경우 사진과 이름이 같이 인쇄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점화효과를 통한 홍보에는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과거 공직선거법은 투표참여 독려 현수막을 선거운동으로 보지 않았기에, 정당 또는 후보자의 명의가 표시된 현수막을 사용한 투표참여 권유행위가 무분별하게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선거운동 목적의 경우 동별로 1부만 첩부할 수 있는데 이 목적이 아닌 경우 수량에 제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조금이라도 본인을 홍보해야 하는 정당과 후보자들은 한 개라도 현수막을 더 걸기 위해 노력하였고 거리는 온통 현수막으로 장사진을 이루었었다. 아마도 투표장에 들어가기 전에 누군가의 얼굴이 그려진 현수막을 본 것과 안 본 것의 차이는 굳이 점화효과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클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에는 무분별한 현수막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어 2014년 국회에서 법을 개정하여 정당의 명칭이나 후보자의 성명, 사진 또는 이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나타내어 현수막 등 시설물 등을 사용하여 투표참여 권유행위를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어쩌면 점화효과를 우리 모두 알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지 않나 생각한다. 아울러, 법의 빈틈이 있으면 후보자들이 들어오고 그 빈틈을 막기 위해 법이 개정되고, 정치의 생동감이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Jonah Berger, Marc Meredith, and S. Christian Wheeler, <Contextual priming: Where people vote affects how they vote>, PNAS 105 (2008): 8846-8849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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