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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민서패밀리 Jun 02. 2017

태몽

아들의 진짜 태몽 이야기


태몽(胎夢)

아이가 태어날 조짐을 나타내는 꿈으로,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출산 전후의 꿈을 통해서 아이의 성별이나 장래를 풀이하였다.




나는 꿈을 잘 꾸지 않는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꿈을 꾼 기억이 많지 않다. 많아야 1년에 한두 번 정도다. 그래서 꿈을 꾼 날에는 꼭 로또를 산다. 무엇이 꿈에 나왔든 상관없이, 그냥 그 자체가 나에게는 특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내는 다르다. 잠깐의 낮잠에도 꿈을 꾼다. 그녀는 정말 "꿈 많은" 소녀다. 꿈 내용도 무척 다양하다. 아내는 꿈에 대해 항상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다고 엄청난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아니고, 나쁜 꿈을 꾸면 그저 좀 더 조심한다던지 하는 정도이다.






아내가 만삭이 될 무렵, 나는 "꿈 많은" 아내에게 분명 태몽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너는 나를 불러 꿈 이야기를 하겠지. 약간 상기된 얼굴로. 꿈에는 아마도 성스러운 무언가가 등장할 거야.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하겠지. 오빠 태몽인 것 같아. 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겠지. 그러고 나서는 나에게 묻겠지. 오빠 좋은 꿈이겠지. 답은 정해져 있지. 응.'


나는 이러한 상황을 무척이나 진지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내 경우 태몽은 커녕 꿈꿀 가능성조차 희박하니까.


내가 태몽을 꾼다는 것은 승률이 4할도 안 되는 만년 꼴찌 프로야구팀이 승률이 6할을 넘고 시즌 1위를 도맡아 하는 팀과의 세 번의 경기에서 모두 승리하는 것과 같은 확률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태몽을 꾸었다.

응?!


물론 그러한 희귀한 확률의 일도 실제로 일어났다.


한화는 2015년 6월 9~11일, 삼성과의 3연전에서 모두 승리해 2008년 6월 10~12일 이후 7년 만(2555일)에 3경기 싹쓸이에 성공했다. 삼성은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정규리그 5년 연속 우승을 한 팀이다.


그런데 나의 태몽은 좀 특이했다. 꿈을 잘 꾸지 않는 사람의 꿈 답게 좀 어수선했다.

역시 뭐든 해본 사람이 잘한다.


꿈속에서 나는 집에 있는 수족관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족관 밖에 왠 낯선 거북이 한 마리가 나와있었다. 몸집이 제법 큰 거북이였다.


'어, 난 거북이를 키우지 않는데?'


좀 뜬금없는 꿈이었다. 논리 따위는 없었다. 꿈 꾸는데 있어 나는 어설픈 대학 1학년생 또는 갓 들어온 이등병 정도 실력이다.


암튼 갑자기 내 앞에 큰 거북이가 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머리를 만지려고 하니 거북이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근데 거북이가 이가 있었나? (나중에 검색해보니 거북이도 이가 있더라.)


그러고 잠에서 깼다. 이게 끝이다. 정말이다.


아내가 만삭일 때 내가 직접 꾼 꿈이니 태몽이라면 태몽일 것이다.



큰 동물이나 식물은 남자아이,
선녀나 꽃, 비녀 등 여성스러운 상징물은 여자 아이의 태몽으로 여겼다.

<국립민속박물관>



후에 남자아이가 태어났고 꿈속 거북이가 좀 컸으므로 거북이 꿈은 이 아이의 태몽이 맞다(고 우길 여지는 충분하다). 연관성은 좀 없어 보이지만.


아내에게는 태몽이라고는 차마 말을 못하고 그냥 거북이 꿈을 꾸었다고만 했다.

아내도 그냥 넘어가는 눈치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꿈을 꿨다.


"꿈 많은" 소녀인 내 아내는 더 화려하고 외부에도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진짜 태몽 같은 꿈을 꾸었다.


내 태몽이 공책에 끄적거린 한 줄 메모라면, 아내의 태몽은 대하드라마이자 블랙버스터 영화라 할 수 있었다.


역시 아내는 꿈 좀 꿔본 사람이었다. 내용 자체가 화려했다.


일단 등장인물로 백사자와 백호가 나온다. 아내가 백사자를 타고 달리는데 옆에 백호 두 마리가 함께 달리는 내용이다.


완벽한 트라이앵글이며 근래 보기 드문 화면구성이었다. 꿈 이야기를 듣는 내내 손에 땀이 쥐어졌다.


훌륭했다. 솔직히 태몽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좋은 형태의 꿈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다. 등장인물, 동선 모두 거짓말처럼 훌륭했다.



보통 호랑이는 용맹스러운 장수, 학ㆍ용ㆍ봉황은 학식이나 벼슬이 높은 학자를 얻을 태몽으로 풀이한다고 한다. 조선시대 대학자 이이(李珥, 1536-1584)도 신사임당이 강릉 오죽헌에서 용꿈을 꾸고 낳아 몽룡(夢龍)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전시 해설>



좋은 꿈인 것 같아서 기분은 좋았다. '꿈보다 태몽이 좋다' 라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우리 부부는 그냥 좋겠지 하는 마음으로 웃고 넘겼다.


내 거북이 꿈은 순식간에 잊혔다. 아내의 꿈 이후에는 누구에게 말하기도 좀 창피했다. 우리의 공식 태몽은 아내의 꿈으로 굳어졌다.






아내 말고도 태몽을 꾼 사람이 2명 더 있었다. 양가에서 태어나는 첫 손주이다 보니 서로 경쟁적으로 꿈을 꾸어댔다. 태몽 경쟁이 이렇게 치열해질지는 몰랐다.


태몽을 꾼 사람은 아내의 외할머니와 내 어머니였다.


아내의 외할머니이자 아들의 증조할머니는 누렇고 큰 호박을 따는 꿈을 꾸셨다고 한다.


내 어머니이자 아들의 친할머니는 문 틈새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는 창고 앞에 서있었는데, 문을 열어보니 황금색으로 빛나는 참외 비슷한 것이 창고 안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두 분의 꿈 역시 멋졌다.

내 꿈은 이제 태몽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며칠 후 우연히 나는 고대가요(옛 시) 하나를 읽게 되었다.


중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는 구지가였다.



구지가(龜旨歌)


龜何龜何(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내어 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구워서 먹으리.



이는 가야국 시조인 수로왕의 강림 신화로 알려져 있다. 임금(거북)을 맞이하는 노래이다.


뭔가 느낌이 왔다. 내용이 내가 꾼 태몽과 같았다.


아니 이런 일이


몇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아내의 고향은 가야국 옛 수도였던 경남 김해이다. 그리고 아내가 결혼 전까지 쭉 살던 집은 수로왕릉 바로 옆 아파트이다. 그리고 그 집에는 여전히 장인, 장모님이 살고 계시다. 심지어 아파트 앞 전철역 이름은 수로왕릉역이다.



This is it.

이게 바로 태몽이다.



나 혼자만의 비밀이다.






The picture from GOST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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