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번여사 Mar 07. 2022

어느 성악가의 메시지

지랄 맞게를 주문받다


북한산 아래로 이사를 오며 아는 사람도 없고, 뭐 실은 남쪽 지방에서 40여 년을 살다 서울로 올라올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하여튼 한동안 제법 낯설었다. 특히나 이곳은 서울이지만 도심으로부터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들어 더 낯설게 느껴졌던 것 같다.


고즈넉함과 고요함을 즐기고 아름다운 산의 사계절을 극찬하다가도,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사람 냄새나는 정겨운 이곳을 마음껏 즐기다가도 가끔씩 채워지지 않는 고립감 같은 걸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강남과 강북의 온도차를 확연히 느끼게 만드는 문화예술에 대한 접근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중 우연히 여기 강북권에 뮤지컬 한여름밤의 꿈을 자신들의 이야기로 각색해서 만든 뒤 무대에 올리는 문화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우 기뻤다. 이번 기회에 지역의 예술인들을 만날 수도 있고 뮤지컬이라는 흔히 접할 수 없는 장르를 맛볼 수도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신청을 하였고 참여를 하게 되었다.


비록 짧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녹여냈던 이 뮤지컬에서 나는 지난 세월 많은 나라를 돌며 여행했던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을 했고 결국 내가 맡은 역은 여행자가 되었다. 얼마 뒤 나의 이야기를 담은 여행자의 노래를 작곡가 선생님으로부터 전해받았다. 그런데 악보를 받아 든 순간 나는 무척 당황했다. 딱 봐도 노래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세상에나! 이렇게 높은음들을 내가 소화해 낼 수 있을까? 이런 뮤지컬풍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원래부터 뮤지컬 곡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어렵고 더 낯설게 다가오는 것일까? 이런저런 걱정과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곡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발걸음이 도무지 가벼울 수가 없었다. 집에 와서 수차례 음을 익히고 노래를 불러보는데도 노래가 입에 잘 달라붙지를 않고 정말이지 내 목소리가 듣기가 싫었다. 큰일이다. 이래서 어떻게 공연을 하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노래 지도를 좋은 성악가 선생님으로부터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나의 노래 성장을 위해서 좋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은근히 생겼다. 지도받는 첫날, 일단 여행자의 노래를 불러 보라길래 떨리고 부끄러운 마음을 지그시 누르며 용기 내어 열심히 불렀다. 몇 차례에 걸쳐 선생님이 지적해 주시는 부분들을 고쳐보려고 애를 쓰면서 부르고 또 불렀다.


그렇게 트레이닝을 마친 뒤 선생님은 나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꼭 하고 싶다고 했다. 노래 부르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데 나는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는 모습, 배려가 많은 사람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노래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며 단 한 마디로 요청하겠다고 했다.


"그냥 마음껏 질러요. 지랄 맞게"

"지랄 맞게 부르세요"

"선생님은 소리도 좋고 노래도 잘해요. 그냥 이제는 지랄 맞게 하시면 돼요"

"지랄 맞게만 기억하고 가시면 됩니다!"


그날 그렇게 전해받은 메시지는 상당히 강렬했다.

'지랄 맞게라고? 지랄 맞게 부르라고?'

남에게 누를 키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내 성향이 몇 년간 팀 활동을 하면서 더욱 견고해져 버렸나 보다. 조금이라도 틀릴까 봐, 팀에게 피해가 갈까 봐, 이 곡에 방해가 될까 봐 늘 전전긍긍해왔던 나의 모습들이 한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런 모습들이 점차적으로 몸에 내재화되고 고착화되어버렸나? 아예 투영되어 밖으로 나오는 것인가, 나의 노래에?


그날의 그 "지랄 맞게 부르세요" 메시지는 현재의 나도, 지난날의 나도 모두 돌아보게 만들었다.


뭘 그렇게 남에게 방해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노래를 부르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그동안 쉼 없이 채찍질하며 달려오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했다. 그러자 그 순간, '그래, 나, 잘해. 잘하는데, 뭘 그렇게 남 신경 쓰며 나를 힘들게 할까? 이제 그만 나를 칭찬하며 격려하고 가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보이지 않게 쌓일 대로 쌓여있던 피로감들이, 어쩐지 모르게 위축되어 있던 내 안의 작은 문들이 활짝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가 날 잡아먹나? 아무 문제도 안 일어나는데 뭘 그리 신경 쓰며 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단 말인가? 그래. 선생님 주문대로 지랄 맞게 부르자!  남 신경 쓰지 말고, 더 자신 있게, 더 당당하게, 나를 칭찬하며 그렇게 부르자! 이것이 선생님이 주신 그 지랄 맞게의 진짜 메시지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나의 음악 지능, 재주는 과연 얼만큼인 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