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살 소녀, 혼자서 방송국에 오디션을 보러 가다

오래된 도전, 노래를 향한 끊임없는 시도들 1

by 멜레하니


뮤지션으로의 성장 일기를 쓴다고 생각하니 56년 나의 인생에서 노래와 관련한 사건들이 무엇이 있었나, 도대체 나는 언제부터 노래를 그렇게 부르고 싶어 했나, 저 먼 세월을 거슬러 가며 하나씩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마구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어쩌면 내 인생에서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 중 최초의 커다란 좌절감이었을 것 같기고 하고 또는 가장 빠른 속도로 포기를 하는 인생 경험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오! 세상에나, 초등학교 4학년 때라니 열한 살이잖아? 열한 살 어린 나이에 나는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생각을 했을까? 맹랑하다. 혼자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다니 정말 별난 아이였고 일찌감치 독립적인 존재였던 것 같다.


그 당시에 KBS 어린이 합창단은 많은 인기를 끌었고 부러움의 대상이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열한 살 어린 소녀인 나에게도 너무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눈처럼 하얀 유니폼을 모두 갖춰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예쁘게 노래하는 그 어린이 합창단이 내 눈에 정말 정말 멋있었다. 나도 머리를 양갈래로 묶어서 땋고 예쁜 리본 고무줄로 묶은 뒤 그들과 함께 층층이 연단에 서서 몸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노래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래서 늘 마음속 저 밑바닥엔 그 단체에 나도 들어가야지 하는 생각을 오래도록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떻게 KBS 어린이 합창단 오디션 날짜를 알게 되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하여튼 그날 나는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지 않고 혼자서 오디션을 보러 방송국에 갔다. 혼자서. 열한 살 어린 소녀 혼자서 말이다.


그야말로 찐! 로망이었던 그 어린이 합창단에 얼마나 들어가고 싶었는지 오디션 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너무나 설레고 기쁜 마음으로 방송국을 찾아갔던 기억이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생생하다. 그러나 그 설렘과 들뜸으로 가득 차 있던 어린 마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당혹스러움과 왠지 모를 불편함으로 가득 채워지고 만다. 막상 씩씩하게 방송국까지는 찾아갔는데 낯선 방송국 안으로 걸어 들어갈 때는 좀 두려운 마음도 일고 그래서인지 걸음걸이가 경쾌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너무나 낯선 이질감을 핵폭풍처럼 느끼고 만다.


나를 제외한 모든 어린이들이 엄마나 아빠의 또는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걸로 보아 할머니나 할아버지일 것 같은 사람들의 손을 잡고 삼삼오오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데 말이다. 그들의 옷차림 또한 그동안 내가 보아오던 부잣집 아이들이 입고 있던 아주 번지르한 옷들이었다. 거기에 하얀 스타킹, 빛나는 예쁜 구두들을 신고 서 있는 모습은 나에게 일순간 찬물을 끼얹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몇몇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팔을 붙잡고 무엇이 짜증이 났는지 마치 아기들이 칭얼대듯이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어린양을 부리는 모습도 보였다. 백지장처럼 하얗고 꿀물 뚝뚝 떨어지는 복숭아처럼 화사한 아이들에 비해 매일 밖에서 골목대장으로 미친년 소리 들어가며 주야장천 뛰어 놀기만 하던 구릿빛 피부의 나는 눈 두 개 가진 내가 눈 세 개의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커다란 이질감을 느꼈다.


나는 순간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스멀스멀 올라오던 당혹스러움과 불편함이 점점 더 커지며 온몸을 뒤덮었다. 이미 이곳은 나와는 다른 세상의 그들, 그들만의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벤트 같았고 내가 낄 자리는 없어 보였다. 와서는 안 되는 곳을 온 것 같았다. 보나 마나 실패를 할 것이라는 직감으로 어린 나는 그만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 볼 때 그 어렸던 소녀가 마음의 상처라도 입었으면 어쩔까 조금은 안쓰럽고 우려스럽기도 하지만 그러나 내게 남아 있는 기억은 집에 오는 길이 별로 슬프지도 그렇게 속상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노래를 못하거나 실력이 없어서 떨어진 게 아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집이 가난한 것, 즉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유로 참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로 게으치 않았던 것 같다. 그 뒤로도 나는 씩씩하게 잘 놀고 잘 지낸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얼마나 강렬한 인상이었던지 내 유년시절 아주 크게 기억에 남아 있는 추억 중 단연 일등이다.


그 뒤 세월이 한참 흘러 고등학생 때 합창으로 방송 출연을 한 적이 있다. 광복절날 용두산 공원에서 촬영을 했다. 어린 시절 KBS 어린이 합창단의 빛나던 단복의 아쉬운 로망을 드디어 여고생이 되어 합창단과 옷을 맞춰 입고 방송에 나가게 된 것으로 어느 정도는 실현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어린 소녀에게 왠지 모르게 진 것 같은 빚을 조금이라도 갚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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