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벼락 넘어 들려오던 피아노 소리

그 소리와 오십 년이 넘어 조우하다

by 멜레하니


어렸을 적 피아노가 무척 배우고 싶었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학교를 다니는 것 외에 그림도 음악도 춤도, 그 무언가를 돈을 들여서 배운다는 것은 거리가 먼 형편의 집이었다. 그러니 집에 피아노 또한 당연히 있을 리 없다. 언니랑 나는 언젠가 피아노가 너무 치고 싶어서 커다란 달력을 찢어 그 뒤에 기다란 자를 대고 피아노 건반을 그린 적이 있다. 그것도 몇 번이나. 그것을 진짜 피아노처럼 생각하며 열심히 누르면서 노래를 불렀다. 물론 계이름의 정확한 건반을 눌러가면서, 머리까지 흔들어 가면서 그렇게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귀엽고 예쁜 장면이다.


어린 시절 나는 언제나 당당하고 씩씩한 골목대장이었다. 동네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세상을 쥐락펴락 하듯 항상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그런 나였음에도 어느 골목길 담벼락 넘어 들리는 피아노 소리는 거칠 줄 모르는 나의 발걸음을 잠깐씩 멈춰 세우곤 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언제나 자신 만만하던 나에게도 뭔지 모르게 나와는 거리가 먼 또 다른 세상이 있구나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알게한 사건. 바로 골목길에서 마주친 담벼락 너머의 피아노 소리다.


따라라라 라라 라라라~ 왜 그때는 피아노 배우는 집집마다 다들 엘리저를 위하여가 흘러나왔는지 몰라!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았었다. 그 피아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며 무언가 사르르 녹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예술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며 치유하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일을 한다는 것을 그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이라고만 생각하며 매번 발걸음이 멈춰 서곤 했다.


다른 무언가를 그다지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항상 쾌활하고 씩씩하던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얗고 검은 그 많은 건반들을 누르고 있을 고사리 같은 아이들의 손은 왠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나도 배우고 싶다, 나도 언젠가는 저거 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때는 예술인지 뭔지도 몰랐지만 그것을 향한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부잣집 담벼락을 넘어 들려오는 그 매혹적인 피아노 소리들을 들으며 나의 예술을 향한 욕망이 꿈틀거리려고 할 때마다 나는 자동적으로 내면에서 무언가 나를 강렬하게 제지하는 힘을 느꼈다. 가난한 집 형편상 저 세상은 너와는 거리가 먼 세상이야라고 말해주는 듯한 보이지 않는 힘, 그걸 본능적으로 자각하며 어렴풋이 나는 할 수 없어 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태생이 명랑 쾌활했던 나는 영점 일초도 걸리지 않고 바로 순응하며 뒤돌아 서곤 했으니까.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삶의 고급 기술인지 지금은 잘 알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 시절 어린 나를 볼 때마다 왠지 짠하면서도 기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리곤 내 특유의 전매특허인 경쾌하게 폴짝거리는 투 스텝으로 하늘하늘 나비처럼 다른 곳으로 뛰어가곤 했다. 그곳엔 내가 주도해서 무수히 많은 놀이들을 창조해서 함께 놀 친구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과 어떤 날은 삔 따먹기도 하고 어떤 날은 공기놀이도 하고 고무줄 뛰기도 하면서 아무것도 비어 있지 않도록 내 어린 시절을 꽉꽉 채워 넣었다.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을 신나게 향유했다.


이렇게 음악이든 미술이든 예술의 영역에 나는 늘 보이지 않는 벽을 느끼면서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내 온몸의 세포들이 알고 느끼고 늘 가까이 다가서고 싶어 했던 그 영역들, 그러나 나는 너무나 오랜 세월 그것에 쉽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 욕망이 꿈틀거릴 때마다 동시에 내가 넘을 수 없는 벽, 예술은 왠지 여유로운 자들의 것이다, 가난하면 예술할 수 없다는, 알게 모르게 심어져 버렸던 무거운 편견의 벽 때문에 쉬이 문턱을 넘지 못했다. 또 성인이 되어 버린 뒤는 일하고 일상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들에 예술은 일치감치 뒤로 밀려 더더욱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버렸던 것 같다.


내가 감히 예술을?이라고 오랫동안 느끼면서 살아왔던 세월, 그러다 오십이 넘어 하와이 음악을 만나고 악기를 배우고 그림을 그리면서 나의 꿈들이 얼마나 오래도록 나를 기다려 왔는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곤 한다. 오늘도 나는 몇 배의 감사와 행복감으로 나와는 거리가 먼 세상의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내가 할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의 것으로 여기며 관심 두지 않고 포기하며 살아왔던 그 많은 세월들을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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