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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가모모씨 Dec 24. 2021

[릴레이]|오늘, 세상이 망했다_3

릴레이 소설을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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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믿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사람들은 시간을 절대적이라고 믿지.”

“아니, 갑자기 무슨 시간 타령이세요. 그럼 형님께선 이 황폐한 곳에서 몇 달씩이나 보냈다는 말씀이세요?”

“나는 이곳에 갇혔어. 어떤 이는 이곳을 빠져나가기도 하지.”

“지금 그럼 여기가 지구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내가 되묻겠네. 어째서 자네는 자네 발이 닿는 그곳이 [현재]의 [지구]라고 생각하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까지 지구에서 나고 자랐는데 여기가 지구가 아니면 어디란 말씀이세요. 폭발 한 번에 제가 머나먼 우주까지 날아가 낯선 별에 정착이라도 했다는 말씀이세요?”

“자네, 정말 양친이 살아 계셨어?”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살아계셨죠! 저를 처음 보시면서 저에 대해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세요?”


그는 내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크게 푹 내쉬었다.


“당연히 알지! 자네는 나이지 않은가.”

“...네?”

“그래. 내가 자네 나이 때는 괜히 단란한 가족이 있는 척하고 평범한 척하느라 바빴지. 마치 그게 나인 양 믿기도 했어. 그 상상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까지 그런 동화에 빠져있으면 어떻게 해? 이젠 자신을 마주 봐야지.”

“형님, 저는 형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그제서야 생생히 내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던 모든 이야기보다 훨씬 선명한. 아픈 동생을 어찌하지 못하고 같이 죽어 버린 엄마. 악착같이 벌고 공부해서 들어갔던 대학교, 그러나 그 이후에도 줄곧 외로웠던 지난 생......


“이게, 이게 다 뭔가요?”

“자네의 진짜 기억이지.”

“아니, 형님. 형님께선 저보다 저를 더 잘 아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자네처럼 자신을 속이며 사는 사람보다 불행하더라도 나처럼 자신을 직면하는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 더 잘 아는 법이야.”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20년 후의 자네야.”

“네?”

“우선 여기가 어딘지부터 알려줘야겠네. 여기는 멸망이야. 사람은 멸망을 생각하는 그 순간에 사실 모두 멸망을 맞이하고 있다네. 그저 우리 우주는 그걸 자네에게 모두 보여주지 않을 뿐이야.”

“그럼 제가 멸망을 생각했기 때문에 멸망이 제게 왔다는 겁니까?”

“그래. 이곳은, 살면서 멸망을 생각하고 맞이한 모든 순간의 자네가 모여있는 곳이야. 시간도 공간도 다 얽혀서 멸망만이 남은 곳이지. 지금의 자네도, 20년 후의 자네인 나도 멸망을 생각한 순간 이곳으로 보내진 거야.”

“아무리 봐도 망한 지구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요. 멸망이라니, 그게 어떤 [공간]이란 말입니까?”

“이 시공간을 만든 건 나와 자네, 바로 우리 자신이야. 우리는 멸망을 놓지 않아. 손에 꼭 쥐고 있어. 지금 주위를 둘러봐. 이 견고한 세계를 말이야. 자네에게 멸망이란 이렇게 실체가 분명하고 견고한 존재란 의미지. 그래서 힘든 순간이면 멸망을 찾는 거야. 아,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하고.”

“이 얘기를 다 믿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그런 비현실적인 곳에 있다는 걸요? 아니, 다른 것보다 형님이 20년 후의 저라구요? 형님이라면 믿으시겠어요?”


그는 왼쪽 어깨에 옷을 내려 보인다. 왼쪽 어깨 뒤편에 점 세 개가 보인다.


- 우리 아들 잃어버려도 이걸로 찾을 수 있겠다


해사하게 웃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 나이가 되어도, 이 점만 보면 그렇게 어머니 생각이 나.”


그제서야 나는 그가 하는 모든 얘기가 현실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만났던 학생과 청년이 떠올렸다. 충격과 외로움으로 가장 버티기 힘들었던 학생 시절. 그리고 끝없는 암흑처럼 살 길이 보이지 않았던 대학생의 나.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나는 앉아 있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모든 게 기억이 났나 보군.”

“형님은 왜 멸망을 생각하셨습니까?”

“얼마 전에 아내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하더군. 참 그 병마란 놈은 말야. 나한테는 오지 않으면서 내 주변 사람들을 다 앗아가는 재주가 있단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미래의 나에게 직접 들은 내 인생에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런 나를 보고 그는 다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20년 후에도 멸망을 생각한다면 제가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 싶네요. 사실 여기에 갇힌 게 다행인지도요.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도 저도 여기 오니 더 이상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 같고요”

“자네는 지금 마음이 편한가?”

“......글쎄요.”

“솔직히 말해봐.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뭐가 있겠어.”

“마냥 편하지 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우리는 모두 잠깐 도망을 친 것에 불과해.”

“도망이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우린 여기 잠시 갇힌 거야. 여기서 빠져나가는 사람을 봤거든. 그리고 나도 이제 현실로 다시 돌아갈 때가 온 것 같아.”

“어디로 가신단 말입니까?”

“나도 여기 와서 모든 진실을 알고 나서 한 동안 그렇게 생각했어. 돌아가지 않는 게 마음 편하겠다고 말이야. 그렇지만...... 내가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외로워도, 20년 뒤에 다시 멸망을 생각하게 되더라도 여기서 끝내지 말라는 거야. 생각보다 자네 인생에 펼쳐질 일들이 많거든”

“앞으로의 20년이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이란 말씀이세요?”

“그래, 나는 아비 없이 자라서 엄마와 동생이 자살을 하고. 그렇게 평생 외로움만이 내 곁에 남아서 모든 풍파를 방패막이 없이 견뎌내야 하는 사람이었지. 자네가 제일 잘 알지 않나? 나는 그게 부끄러워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마치 내가 아닌 양 부정하며 살게 되었어. 아내는 그런 내가 처음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부정하지 않게 해 준 사람이야. 그녀는...... 내가 처음 선택한 내 가족이었어.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건 내 인생에 가장 큰 행운이었지. 지난 20년은 사실 다시 떠올려도 가슴 뛰는 일이야. 내가 이 생에 뿌리를 내리는구나, 실감하게 해 준 일들로 가득하지.”

“뿌리라.”

“그래, 자네가 한 번도 가지지 못했다고 느끼는 그 뿌리 말이야.”

나는 도통 모를 말이었다. 절망감에 가득 차 멸망을 경험하고 있으면서, 나한테는 그래도 현실로 돌아가 살아내라니.

“형님, 자랑스럽게 말씀하십니다. 형님도 멸망을 생각하고 여기로 오셨으면서요.”

“후후, 나는 여기 와서 결국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났거든. 이제야 돌아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어. 그리고 자네도 곧 돌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드네.”


그는 갑자기 일어나서 툭툭 바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나를 슥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나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였다. 말없이 앞으로 걷기 시작한 그는 점차 내 눈앞에서 사라져 갔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20살이 많다는 나 자신은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러려면 왠지 한 분을 더 만나야만 할 것 같다.




-노인도 한 명 있었다네.


수년을 이곳에 있었다는 노인. 그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에휴, 젊은 놈이 찾아와야지. 노인을 이리저리 오라 가라 하면 쓰나? 뭘 듣고 싶어서 아직까지 여기 있는 게야?”


그의 목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쩌렁쩌렁 아주 목청이 높았다. 할아버지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나를 툭툭 치며 말을 걸어왔다.


“할아버지는 어쩌다 여기에 오셨습니까? 그 나이가 돼서도 멸망을 생각하나요?”
“이 나이가 되면 매 순간이 멸망이야.”
“그럼 저는 사실 지금 망해도 되는 게 아닐까요?”
“예끼, 버르장머리 없는 것! 이 늙은이 앞에서 죽겠다고 시늉하는 게야? 내 나이가 되어봐. 이제 산전수전 다 겪고 맞이할 일이라고는 멸망밖에 없는 사람이야. 어떻게 하면 잘 마무리할까. 후회 없이 마무리할까. 그런 고민을 하지. 자네처럼 현실에서 도망치듯 콱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하는 깊이 없는 멸망이랑 같은 줄 알어? 나한텐 멸망이 현실이야. 어딜 내 앞에서 망하고 싶단 말을 들이밀어, 들이밀기를?”


나는 꽤 꼰대로 늙는가 보다. 그래도 저 나이가 될 때까지 살아있다니. 매일 멸망을 읊조리던 입장에서는 조금은 신기하기도 하다.


“그래서 어르신. 그때까지 살고 보니 좋으십니까?”
“자네 삶이 좋고 나쁨이 있다고 생각하나?”
“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다가 지쳐봐도 모르겠어? 어디 삶이 노력한 만큼 다 좋게 흘러가냔 말이야.”
“그럼요?”
“그저 삶이란 파도 타는 거지. 거 왜, 항해하는 배 위에 올라탔다고 생각해 보게.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는 물결에 몸을 싣는 거란 말이야. 그렇게 살다 보면 눈 감는 그날에 당도해 있는 거고.”
“그럼 다 내려놓고 살아야 할까요?”
“그렇게 내려놓고 살다 보면 아 고삐를 쥐어야겠다 하는 순간도 오고. 또 고삐를 미친 듯이 틀어쥐다가 다 놓는 순간도 오고. 그러는 거지.”
“그래서 좋고 나쁨이 없다면 왜 사는 건가요? 그때까지 사는 게 의미가 있으십니까?”
“뭐 더 좋은 거 보는 날도 있으니까. 그런 거 보면 좋고. 그럼 또 살고 싶고 그런 거야. 가족들 다 떠났을 땐 죽고 싶다가 또 대학 가는 날에는 살아질 것 같고. 돈 없어서 당장 죽겠다가도 또 좋은 회사 가기도 하고. 사람들 멸시받는 게 싫어서 스스로를 속이다가 또 거기서 구제해 주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없던 가족이 생기기도 하고. 가족 같던 놈이 뒤통수치기도 하고. 그런 거지 뭐. 네가 뭐 특별히 나쁜 것 같아? 사실 우주에는 좋고 나쁨이 없어. 다 사람이 판단하는 거지.”


나는 노인의 주름진 입에서 낡은 목소리들이 천천히 흘러나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좋았다는 겁니까, 안 좋았다는 겁니까,라고 묻고 싶었지만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노인은 내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그래서 자네는 언제까지 살 생각인가?"

"네?"

"언제까지 살 생각이냐고.. 오늘까지 살 텐가, 아니면 내일? 1년 후? 10년 후?"

"그게 언제까지 산다고 스스로 정할 수가 있는 건가요?"

"정할 수 없지"

"그런데 그건 왜..."

"그러나 의지를 가질 수는 있지"

"의지를 가진다고 해서 그때까지 살 수 있는 건가요?"

"의학적인 걸 말하는겐가? 그거는 신만이 아는 일이지. 그러나 내 삶의 기한은 스스로 정할 수가 있어. 심장이 뛰고 뇌가 활동하는 것과는 별개로. 삶을 사는 것, 살아있다는 그 느낌 말일세. 그건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지."

"무슨 말인지 대체"

"그래서 자네는 언제까지 살고 싶은가?"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라면, 신이 제 숨을 거둬갈 때까지 살아 있고 싶습니다"

"그래. 그거면 되었네"


노인은 입을 다물고 저 폐허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노인의 탁한 눈망울에 어린 잿빛이 원래 노인의 눈동자인 것 마냥 자연스러웠다. 그러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이 세상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했지."

"네. 아니 그치만, 정말 망하길 바라서는 아니구요. 그냥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인데..."

"그러니까 자네가 그 말을 내뱉었단 말이지"

"네..."

"그래서 세상이 망해버리니 어떤가? 소원대로 되지 않았나"

"아니, 이게 제 소원은 아니구요. 당연히 좋을 리 없지 않습니까. 너무 당혹스럽고 무서운데."

그러고 나서 보니 이 노인, 나를 보며 실실 웃는 얼굴이다. 이 영감이 지금 사람을 놀리나, 하고 부아가 치밀었다. 아. 나는 늙으면 절대 이러지 말아야지.  

"버겁지. 버거울 수 있지. 우리 인생은 늘 그랬지 않았는가"


노인은 씩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들고 있는 지팡이로 다시 나를 툭툭 쳤다.


"이제 다시 가봐"

"네? 어디로 말입니까"

"그거야 자네가 알지"

"어르신은 어디로 가실 거세요"

"나는 여기 있어야지. 나는 이제 멸망이야"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걸을 준비를 한다. 이제야 노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얼굴엔 검버섯이 가득하고 주름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움푹 패인 주름 사이에도 자글자글한 주름들이 가득하다. 지팡이를 움켜쥔 두 손에 뼈 마디가 앙상하게 툭툭 튀어나와있다. 양 어깨뼈가 툭 튀어나와있는 것이 왜소해 보이는 느낌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손을 바라보았다. 지난 며칠 사이에 고생을 하느라 여기저기 상처도 나있고 알 수 없는 시컴댕이가 묻어 있지만 두툼하고 큼직한 느낌을 주는 손이다. 내가 늙으면 저렇게 된단 말이지. 여전히 상대가 나의 미래의 모습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아주 거대한 세트장에 갇혀서 모두가 나를 놀리는 듯한 느낌이다. 아니면 나는 지금 긴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어르신.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모르긴 뭘 몰라. 어서 가보래도"

"어르신"

"에잉 쯧쯧. 미련 많은 것도 닮았어"


노인은 귀찮다는 듯이 지팡이를 내게 휘휘 내저었다. 나는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두어 걸음 옮길 때마다 뒤를 돌아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지팡이를 손에 쥔 채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눈을 감았는지 떠있는지 보이지 않아 알 수 없는데, 나는 왠지 그가 눈을 감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정말인지 그냥 문득. 그가 선 채로 죽음을 맞이한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덜컥 겁이 났다. 무서웠다. 나는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여전히 온갖 것들이 널브러져 있어서 발에 채였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멸망이라니. 노인의 멸망은 무엇일까. 이 공간이 곧 멸망 아닌가. 멸망에게서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한참을 정신없이, 정체와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뛰다 보니 나는 어느 순간 공터에 누워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렇다고 슬픈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슬프다기보다는 후회에 가까운 눈물이다. 무엇이 그렇게 후회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다 후회가 되었다. 늘 피곤함에 쩔어 있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파리하게 말라가던 동생의 표정과 '형아'라고 부르던 그 아이의 힘없는 목소리도 생각난다. 평온한 표정이지만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던, 어머니와 동생의 표정도 떠오른다. 아버지의 포효도 귓가에 맴돈다. 현재로서는 존재를 알지 못하는, 미래이자 과거에 존재한 내 아내의 해사한 모습도 생각난다. 죽음에 가까워져 가는 아내가 내 손을 잡는 그 감각도 느껴진다. 나는 지금 과거, 현재, 미래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내 짧고도 긴 삶은 늘 외로움과 죽음 곁에 있었다는 것이다. 몸서리가 처지도록, 내 속이 서늘해지도록 외롭다. 그리고 무섭다.


"아저씨"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내 눈앞에는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가 있었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보았는데. 아이는 꾀죄죄한 티셔츠에 바지를 입고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로 서 있다. 눈가에는 눈물과 콧물이 잔뜩 뒤엉킨 꾸중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저씨. 저 엄마...  끄흑.. 엄마.. 아빠를 흑 잃어버렸어요"


아이는 눈물을 꾹 참고 문장 하나를 겨우 말하더니 이내 울음을 와앙 터트린다. 울음과 울음 사이에 엄마나 아빠를 섞어서 부르기도 한다. 아이의 눈물과 마주한 나는 반사적으로 아이를 안아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울지 말고. 아저씨랑 엄마 아빠 찾아보자"


그렇지만 엄마, 아빠를 찾는다니. 이 멸망의 세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아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운다. 그러다가 나의 난처한 표정을 힐끗 확인하고는, 자신의 부모를 찾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라도 들었는지 아니면 이 덩치만 큰 어른을 움직이게 만들고자 종용하는 것인지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앞서 만난 사람들의 말이 맞다면, 이 아이 역시 나의 과거이겠지. 내가 이렇게 작고 연약했던 시절의 모습이 내게 나타난 것이겠구나. 그리고 아이에게 엄마, 아빠가 없는 세상은 멸망과도 같은 느낌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작고 소중한 아이를 꼭 껴안았다. 불가능하단 것을 알았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이의 부모님을 찾아주고 싶었다. 어렵다는 것 또한 알았지만 아이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아이가 엄마, 아빠를 만나 구김 없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단란한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컸으면 좋겠다. 어려운 일도 있겠지만 단단하고 강인한 사람으로 자라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는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의미 없는, 그렇지만 진심을 담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괜찮아.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아이를 한참 어르고 달래다 보니, 다행히 아이는 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서는 딸꾹질을 한참 하더니 그 또한 진정되었는지, 내 품에 반쯤 폭 안긴 채로 아이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저씨. 정말로 우리 엄마랑 아빠 찾아 줄 거예요?"

"응. 그럴게. 약속할게"

"감사합니다"


아이는 내 품에 뛰어들어 나를 안았다. 아이의 젖은 두 뺨이 내 뺨에 닿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작은 두 손이 내 허리 어딘가에 닿는 느낌이 퍽이나 포근했다. 나도 아이를 최대한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아이를 안은 나는 여전히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는 없지만, 폐허의 땅 위로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아이의 어깨너머 지평선 어딘가에서 강렬한 섬광이 번뜩였다.


- 끝


현-희-효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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