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정김 May 19. 2023

[상황 제시] | 시차

나는 계속 잠에 들지 않은 채 그저 천장만을 쳐다보고 있다.

| 상황 제시 |


나는 누워 있다. 방은 어둠과 적막으로 가득 차 있다.

귀에 들리는 것은 오직 째각거리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시계 초침 소리 뿐이다. 

불을 하나도 켜고 있지 않아도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방안 곳곳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바깥에서 흘러오는 빛에 슬쩍 보이는 시계는 어느 덧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다.

잠에 들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 3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누워서 TV를 켜거나 스마트폰 창을 바라봐도 되련만, 굳이 누워서 뒤척이며 방 안을 둘러본다.


깨끗이 정리된 가구들도 어렴풋이 보인다. 

나는 구석에 침대와 함께 덩그러니 놓여 있다.

침대 가운데 대자로 누워있다. 

이불은 따로 덮지 않는다. 

그럼에도 날은 덥고 방 안은 습기가 차 있다. 누워있는 침대조차 눅눅한 기분이다. 


나는 가만히 천장을 본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창 밖에서 방 안으로 침범해 들어온다. 

잠에 들지 않는 나는 이따금씩 지나가는 헤드라이트가 반가워 가만히 천장을 들여다 보기만 한다.

나는 계속 잠에 들지 않은 채 그저 천장만을 쳐다보고 있다.






<시차>



- 나는 함께 일출을 볼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 여행 가고 싶다는 말이야?
- 넌 생각해 본 적 없지? 우리는 바다 바로 앞에 창문이 엄청 큰 비싼 숙소에 묵었을 때도, 재작년 새해에 해외 여행을 갔을 때도, 동해 갔을 때도 단 한 번도 같이 일출을 본 적이 없어.
- 일출이 보고 싶어?
- 아니. 이제 일출을 같이 볼 수 있는 사람을 사귀고 싶다고.
-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우리는 일출을 함께 볼 수 없다는 거야?
- 응.
- 어째서.
- 넌 그때 못 일어나잖아.


2주 전 나는 선영이게 차였다. 그녀는 함께 일출을 보러 갈 수 있는 남자친구가 필요하다고 했고, 그녀의 머릿 속에서 난 그럴 수 없는 남자친구라는 것이 확정되어 있었다. 아니라고.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다시 한 번 붙잡으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도 내가 그런 남자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으니까.


선영이 회사의 출근 시간은 9시였다. 그녀는 나와 함께하던 2년 내내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꼬박 밤 11시에 침대에 누워 1시간의 자유 시간을 가진 후 12시에 잠이 들어 7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7시에 일어날 즈음 잠에 들었다. 평생 이런 식으로 자고 깼던 건 아니다. 나에게도 10시에 출근해 7시에 퇴근하는 회사를 익숙하게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회사를 퇴사하고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하며 오로지 내게 맞춰 시간이 조금씩 늦춰진 것이다. 작업은 밤새 마무리해서 파트너사 담당자가 출근 후 확인할 수 있게 보내두면 될 일이었고, 미팅이나 전화가 필요하다면 오후 시간에 하면 되었다. 아주 가끔 오전에 걸려 온 전화로 잠이 깨는 일도 있었지만 내 작업은 주로 시간에 쫓기는 종류의 것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마저도 정말 아주 가끔이었다. 애초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일하는 게 내 방식이기도 했고.


그렇게 나만의 성실한 생활을 이어가던 중 선영이를 만났다. 사실 선후 관계를 좀 더 정확히 따지면 선영이와 사귀게 되면서 내 취침 시간은 더 늦어지게 됐다. 우리가 만난 지 1년 정도가 될 때까지 그녀는 내게 조금만 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순 없냐고 자주 묻곤 했다. 꼭 같은 시간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오전이라 부르는 그 시간에 하루의 안부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선영이의 부탁을 들어주려는 마음으로 나는 취침 시간을 1시간 정도 더 늦춰 이윽고 그녀의 기상 시간과 내 취침 시간이 정확한 박자로 딱 맞아 떨어진 거다.


- 잘잤어?
- 잘자


그리고 나서 언젠가부터 선영이는 일찍 자라 말하는 횟수가 줄었고 또 언젠가부터는 아예 하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은 그토록 정반대의 라이프스타일로 어떻게 연애가 가능하냐고 신기해했지만 우리는 정반대가 아니었던 거다. 그보다는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하나의 돌림 노래라는 게 더 적절했다. 누구 하나가 조금 일찍 가서 조금 일찍 마무리할 뿐 겹치는 부분은 언제나 있으니까. 선영이와 내가 겹쳐지는 저녁과 밤, 그리고 선영이를 위한 나의 노력으로 맞춰낸 아침 인사는 늘 문제 없이 다정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헤어진 후 일주일 동안 난 보란듯이 일출을 실컷 즐겼다. 밤새 일을 하고 옥상에 올라가서 일출까지 보고나서 잠이 들면 될 일인데 내가 어째서 함께 일출을 볼 수 없는 남자인지. 어느 날은 집 근처 강변까지 걸어나가 산책도 하며 일출을 보고 왔다. 그녀에게 보내줄 것도 아니었지만 일출 사진도 매일 찍었다. 그래 넌 일출만 같이 볼 남자나 만나라. 난 일출도 보고 일몰도 매일 같이 볼 수 있는 여자를 만날거다. 그러면서 홀로 일출을 본 지 8일 째 되던 날, 하늘을 뒤덮은 붉은빛 해가 감당할 수 없게 눈부셔 그만 눈물이 핑 도는거다. 선영이는 이런 일출에 눈을 떴을까.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눈 깜빡하는 새 세상이 뒤바껴 있는 듯 비현실적인 일출이 꼭 우리의 이별 장면 같아 더 이상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녀가 그리웠다.


일출을 보러 가자고 나에게 좀 더 친절하고 정확하게 말해줬다면 좋지 않았을까. 대체 일출이 뭐길래 픽하면 사라질 고작 그 찰나의 순간이 우리가 함께한 2년이란 시간을 뒤엎을 수 있는지. 오늘 보고 내일 또 볼 수 있는 일출이 뭐길래 왜 우리가 더 이상 볼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건지. 그리움이 다시 분노로 바뀌어 지난날을 회상하다 보면 마지막엔 선영이가 또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선영이는 일출이 보고 싶다고 곧잘 친절하게, 정확하게 말했었다.


- 내일 일출 7시라던데 이번엔 잠시 이 앞에 바다 나가서 보고 올까?
- 그럼 나 잠들 시간이 너무 애매할 것 같은데. 여기까지 왔는데 아침에는 좀 자야 낮에도 더 일찍 일어나서 구경하러 다니지.
- 그래. 그럼 내일 구경 많이 하고 저녁에 일몰이나 보자.

 
- 내가 오늘 구경할 코스 좀 짜봤어. 오후까지 푹 쉬고 근처에서 밥먹고 저녁에는 정수한테 추천받은 여기 가자. 그리고 유명한 야시장 있다니까 구경하다가 클럽도 가볼까? 여기까지 왔는데 다 놀고 가야지.

- 내일도 그럼 일출은 못보겠지?

- 들어오면 새벽일텐데 일출은 힘들지 않을까. 여행까지 왔는데 너도 내일은 너무 일찍 일어나지 말고 늦게까지 푹 자는 거 어때.

- 그래. 여행까지 왔으니까. 새벽까지 놀려면 오늘은 비타민 두 알 먹어야 겠다. 밤에 옷 뭐 입을까.

- 이번주 토요일에는 회사 동생이랑 등산 다녀오기로 했어. 일출 시간 맞춰서 해 뜨는 것도 보구.

- 요즘 등산이 그렇게 유행이더라? 잘다녀와.

- 일출 때 해뜨는 거 사진 찍어서 보내줄게.

- 응. 너 등산 다녀와서 좀 쉬다가 우리는 밤에 영화나 보자.

- 그래. 영화 시간 내가 찾아 볼게.


선영이는 내가 생각나지 않는 순간마다 일출이라는 말을 얼마나 더 했던걸까. 우리는 함께 돌림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전혀 다른 두 곡의 노래였는지도 모른다. 두 노래가 미세한 간격으로 점점 멀어질 때마다 선영이는 “그래”라는 추임새를 넣어 혼자 그 마디를 메우려 애쓰고 있었을까. “그래"라고 말하던 선영이의 목소리는 분명 들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이제와 생각하면 조금 체념했던 목소리였던 것 같기도. 하지만 표정만은 확실히 웃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기대하는구나 생각했는데. 아닌가. 어딘가 씁쓸한 미소였던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선영이는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투로 대답했지. 사실 선영이가 저렇게 말한 게 맞는 건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별 후 8일째 아침, 그러니까 지난주 수요일 아침은 해가 유난히 더 비현실적으로 환했던 탓이었는지 선영이와 함께한 일들이 자꾸만 아득해지는 기분이 드는 거였다. 더 이상 멀어지면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떠오르는 해를 타고 하늘을 자꾸만 물들였다. 발끝에 비추기 시작한 빛이 온몸을 완전히 휘감아 버리기 전에 어서, 이번에야말로 내가 그녀를 위해 “그래"라고 말해야 할 타이밍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선영이의 바람대로 함께 일출을 볼 수 있는 남자친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러려면 수면 패턴부터 바꿔야 할 거다. 우선은 밤을 샌 후 일출을 보고 잠 드는 것부터 당장 그만 두기로 했다. 선영이가 잠드는 시간은 보통 12시니까 내 취침 시간 목표는 2시로 정했다. 선영이와 똑같이 12시에 자는 건 아무래도 절대 지킬 수 없을 것처럼 너무 빠른 느낌이 났고, 3시간은 왠지 차이가 크게 느껴졌다. 2시간 정도면 무난하지 않을까. 평소 아침 7시에 자던 패턴을 급격하게 바꿀 순 없으니 매일 조금조금씩, 딱 5시간만 당겨보면 될 것 같았다.


첫 날은 5시에 누웠다. 아침 7시에 잔다고 하면 라이프스타일이 엉망인 것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수면 시간만 일반적이지 않을 뿐 내 일과는 비교적 일정했다. 불면증 같은 것도 겪어본 적 없고 자리에 누우면 별 어려움 없이 곧잘 잠이 드는 타입이었다. 그래서인지 2시간 일찍 누운 것 정도는 수월했다. 그새 더워진 밤 공기에 더워서 깨진 않을까, 에어컨 예약은 몇 시간을 맞춰야 하지, 1시간이면 너무 짧지 않나 걱정할 틈도 없이 어느새 잠이 들어 오후 12시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둘째날 과감하게 1시간을 더 당겨 4시에 누웠다. 첫날보다는 약간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번에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문제는 셋째날부터였다. 난 어쩌면 좀 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딱 맞는 체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자만은 3시부터 꺾였다. 5시에서 4시로, 4시에 3시로 차근차근 줄여 나간다고 생각했는데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지루한 영상을 몇 개 찾아봐도 정신은 말짱했고 어느덧 5시도 넘어 첫날의 기록마저 무색해진 상태였다. 시간을 알고나니 괜한 초조함 때문인지 더위까지 급격히 몰려왔다. 침대에서 일어나 테이블에 올려둔 에어컨 리모콘을 집어 다시 예약을 맞췄다. 더워서 그럴지도 모를 일이니까. 2시간 정도면 잠에 들 수 있겠지. 열기로 덮혀진 자리를 피해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뒤집어 누우며 잠시 절망했지만, 아직 3일째라 생각하고 나니 다시 마음이 편해졌다. 선영이는 한창 자고 있을 시간이겠지. 그녀는 내가 이렇게나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잠은 잘 자고 있을까. 돌이켜보면 그녀는 가끔 불면증을 호소하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런 생각하지 말고 그냥 눈 감고 있으라고, 그러면 잠이 올 거라고 말했다. 잠이 안오면 굳이 지금 꼭 자야 하냐고 물어봤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선영이는 뭐라고 또 말을 했던가 입을 닫고 다음 화제로 넘어갔던가. 그러니까 잠이 안올 땐…


3일째는 선영이에 대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잠이 들었다. 잠을 설친 탓인지 5시에 잠자리에 든 첫날보다도 늦게 1시에 겨우 눈을 떴다. 3일 간의 노력이 도돌이표 마냥 제 마디로 돌아온 것 같았다. 4일째는 다른 날보다 몸을 좀 더 고되게 움직여 보기로 했다. 그러면 지쳐서라도 좀 더 빨리 잠들겠지. 언젠가 선영이가 잠이 안온다고 할 때 똑같은 방법을 알려줬던 기억이 났다. 일을 하다 첫 번째 끼니를 먹고 난 후 커피를 사러 밖으러 나갔다. 원래는 집에서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시지만 일부러 동네를 멀리 돌아 카페까지 가는 길이 두 배는 되도록 걸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동네에 있는 자그마한 공원을 산책하며 몸을 가볍게 풀고, 그 다음에는 강변을 따라 한 시간이 넘도록 뛰었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다음날 업무 정리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하품이 나왔다. 역시 이 방법이 통했던 거다. 급격히 노곤노곤해지는 기분에 책상을 정리하고 누우니 2시쯤이었다.


그렇게 4일째는 다시 가뿐히 잠에 들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전날의 수면 부족에 평소의 나라면 하지도 않던 운동까지. 몸은 지쳐 쉬라는데 어쩐 일인지 정신은 자꾸만 맑아졌다. 잠이 들지 않는 눈은 감고 있어도 자꾸만 아려왔다. 혹시 낮에 마신 커피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커피 때문에 잠을 못 잔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커피는 오히려 잠이 오는 순간에도 잠을 쫓지 못한 일이 더 많았다. 선영이는 한창 자고 있을 시간이겠지. 연애 초 선영이는 커피를 즐기지 않았다. 그러다 유난히 커피를 좋아하는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커피 맛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내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며 향이 좋다고 배시시 웃던 그녀의 얼굴이 해처럼 떠올랐다. 그녀는 내가 이렇게나 괴롭게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일출이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각자의 삶이 있는 것처럼 각자의 아침이 있을 순 없는 건가. 우리의 돌림 노래는 향 좋은 커피를 함께 마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나. 일출은 왜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일까. 일출이 내게 와서 맞춰질 순 없는걸까.


이틀 간 제대로 잠을 못 잔 탓인지 5일 째는 굳이 운동을 하지 않아도 몸은 충분히 고된 상태였다. 혹시 모르니 낮에는 커피도 마시지 않고, 인터넷을 검색해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카모마일 티를 물 대신 하루종일 마셨다. 불면증을 없애 준다는 영양제도 배송이 가장 빠른 곳에서 더 비싼 돈을 내고 주문했다. 몸이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는 상태였는지, 커피를 안마신 덕분인지, 카모마일 티의 효과인지, 조금 뒤척이긴 했지만 그래도 5일째는 어느 정도 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불면은 6일째 다시 또 찾아왔다. 총알 배송으로 도착한 영양제도 먹었지만 버라이어티한 효능은 없었다. 


7일째, 그러니까 오늘은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을 다 했던 것 같다. 커피도 안 마시고, 오후와 밤 두 번의 고강도 러닝도 하고, 하루 종일 카모마일 티도 마시고, 영양제는 두 배로 먹었다. 오늘은 진짜 완벽하다 생각했는데 너무 완벽한 탓이었는지 샤워를 하고 나와 소파에 앉은 틈에 잠들어버린 것이다. 불편한 자세 탓인지 허리가 뻐끈해 눈을 뜨니 11시쯤이었다. 그래도 이런 상태라면 다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물을 한 잔 마시고는 불을 끄고 침대에 바로 누웠다.


그리고 불면은 어김 없이 시작되었다.


선영이와 헤어진 날부터 매일 혼자 일출을 보던 날들, 그리고 오늘까지 그녀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곱씹으며 나는 여전히 누워 있다. 방은 어둠과 적막으로 가득 차 있다. 귀에 들리는 것은 오직 째각거리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시계 초침 소리 뿐이다. 불을 하나도 켜고 있지 않아도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방안 곳곳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바깥에서 흘러오는 빛에 슬쩍 보이는 시계는 어느 덧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다. 잠에 들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 3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누워서 TV를 켜거나 스마트폰 창을 바라봐도 되련만, 굳이 누워서 뒤척이며 방 안을 둘러본다. 깨끗이 정리된 가구들도 어렴풋이 보인다. 나는 구석에 침대와 함께 덩그러니 놓여 있다. 침대 가운데 대자로 누워있다. 이불은 따로 덮지 않는다. 그럼에도 날은 덥고 방 안은 습기가 차 있다. 누워있는 침대조차 눅눅한 기분이다. 

나는 가만히 천장을 본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창 밖에서 방 안으로 침범해 들어온다. 잠에 들지 않는 나는 이따금씩 지나가는 헤드라이트가 반가워 가만히 천장을 들여다 보기만 한다. 나는 계속 잠에 들지 않은 채 그저 천장만을 쳐다보고 있다.


선영이는 한창 자고 있을 시간이겠지. 그녀의 아침과 밤, 나의 아침과 밤. 이렇게나 노력을 하는데도 그녀와 나 사이의 시간이 더 더욱 멀게 느껴진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절대 일출을 같이 볼 수 없는 남자친구가 맞는 것 같다는 좌절감이 들다가, 어쩌면 다시 또 잘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떠오르고 지는 추억들 속에 내일 일출은 몇 시일까를 생각하다 문득, 뭔가가 머리를 스쳤다. 그녀와 내 마디 사이의 간격을, 우리의 시간을, 불변의 진리일 것만 같던 일출 시간을 내게 맞출, 이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


얼른 스마트폰을 들어 포털사이트를 켠다. 세계 모든 도시들의 시간을 하나하나 짚어 보며 한국과의 시차를 계산한다. 유럽이었던 것 같은데. 이 중 뭐였던 것 같은데. 그래, 베를린. 한국보다 8시간이 느리니 내가 독일에 간다면 선영이와 함께 12시에 잠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프랑스도 좋고. 선영이는 대학생 때 다녀왔던 유럽 여행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기회가 되면 우리 둘이 함께 유럽 여행을 가고 싶다고도 했다. 그 이야기 속에 독일이나 프랑스도 있었던가. 모르겠다. 하지만 유럽 여행이라면 분명 있었을 거다. 없었더라도 유럽이니까 선영이는 틀림 없이 좋아할 것이다. 싫다면 비슷한 시간대의 또 다른 나라를 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 선영이에게 마음에 드는 한 곳을 고르라고 하면 되겠지. 지금 하는 프리랜서 일은 거기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미팅이야 온라인으로 하면 되고. 선영이는 거기서 또 다른 직업을 찾아봐도 좋지 않을까. 100세 시대고 다들 N잡러를 꿈꾼다고들 하니까. 직업은 여러 개 해볼 수록 좋지. 그곳에 가면 나는 선영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아침형 인간으로 살 수 있을거다. 나는 일출을 같이 볼 수 있는 남자친구가 될 수 있을 거다.


스마트폰을 들어 메신저 앱을 켠다. 지우지 않은 선영이와의 대화방을 누르고 메시지를 보낸다.


자니?


매거진의 이전글 [릴레이]|오늘, 세상이 망했다_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