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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May 16. 2021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은 누구를 위함인가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직장 동료의 외조모상이었다. 조문을 가는 것이 혹 부담스러울까 봐 조의 메시지를 보내려다 그냥 다녀왔다. 어떤 글로도 조의가 표현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뉴스에서 모 유명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고인의 동료들이 SNS에 올린 추모글은 ‘[전문]’이라는 머릿말을 달고 실시간으로 보도되었다. 그들의 슬픔이 곡해될까 두려웠다.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서 옛 지인의 부고를 접했다. 그의 아버님께서 비통한 마음을 글로 적어 그의 프로필 사진에 걸어두셨다. 날짜를 보니 1년 전이었다.


매일 누군가는 죽는다. 그럼에도 부고 앞에서 내가 이토록 괴로운 건 고인이 아닌 남아 있는 사람들 때문이다. 홀연히 자연으로 돌아간 이들 말고, 남겨져 계속 추억해야 할 사람들 때문에. 모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삶이라는 게 참 못됐다.


유족은 본인을 챙길 새가 없다. 장례식장에선 조문객의 식사를 챙겨야 하고, 장례가 끝나고 나면 온갖 서류 처리며 유품 정리까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종종 날아드는 주변인의 안부에 괜찮은 척도 해줘야 하고, 결혼식 답례품을 돌리듯 위로해준 이들을 만나 감사 인사도 전해야 한다. 마음껏 슬퍼할 시간이 없다. 경험해보니 그렇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은 누구를 위함일까. 나는 산 사람을 위해 한다. ‘고인은 좋은 곳에 가셨을 테니 살아있는 당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한다. 고인은 말이 없다. 천국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 그곳에서 사람들이 빌어준 명복의 은혜를 입긴 했는지, 아니, 애초에 사후세계라는 게 존재하기나 하는지, 우리는 그 무엇도 확인받을 수 없다. 추모는 참 덧없다.


허나 그 덧없음이 살아있는 자들을 지탱해주는 힘이 아닐까 싶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인과의 과거를 추억하고 그들의 못다 한 생애를 안타까워하는 일뿐이지만, 그 쓸쓸함이 우리를 더 열심히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것 같다. 그들의 아쉬움을 내 삶에 더해 더 풍성한 무언가를 만들어내 보려고, 그리고 만약 사후세계가 있다면 그곳에서 만나 그들의 몫을 떼어주려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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