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아빠 이번에 보험 하나 더 들었어”
“갑자기? 안 그래도 보험 많은데 뭘 또 들었어”
아빠가 보험에 중독됐다. 마음은 알겠다. 아빠 죽으면 장례 비용이라도 나와야 하지 않겠냐고, 남겨줄 유산도 없는데 그런 것까지 우리 남매한테 부담주기 싫다고, 입이 마르고 닳도록 얘기하셨었으니까. 그런데 차마 아빠한테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아빠, 보험 그만 들어도 되니까 그 돈으로 빚부터 좀 갚아, 제발!!’
아빠는 실내 건축업에 종사하는 개인사업자다. 이쪽 업계는 보통 “견적→공사→수금”의 형태로 일이 진행된다. 후불제라는 소리다. 우리 아빠는 밖에서 싫은 소리 절대 못하는 스타일이고, 이런 사람이 “선 투입 후 정산” 시스템인 산업에 종사하게 되면? 결과는 뻔하다. 어느 순간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다.
“아빠, 제발 제때 수금 안 해주는 회사 일 좀 해주지 마. 맨날 돈 안 준다고 난리면서 왜 자꾸 해주는 거야.”
“나 아니면 안 된다고 난린데 어떡해 그럼. 너는 사회생활을 너무 몰라. 사회생활하다 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지”
“아니, 이럴 때가 한두 번이어야지. 하루도 안 쉬고 일하는데 왜 맨날 돈이 없냐고. 아빠가 느끼기에도 이상하지 않아? 월급 밀리는 회사는 다니는 게 아니라며. 근데 아빠는 왜...!!”
“아, 됐어 됐어. 너랑은 말이 안 통해”
아빠는 매일 새벽같이 나가 일을 했고, 매일 돈이 없었다. 일한 대가를 요구하는 게 왜 어려운 일인 건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 답답한 건 매번 돈을 못 받으면서도 그 거래처와 인연을 끊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빠가 너무 한심해 보여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보게, 늙은이. 너무 생각하지 말게. 이대로 곧장 배를 몰다가 불운이 닥치면 그때 맞서 싸우시지.”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생각을 해야 해,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내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는 일밖에 없으니까. -《노인과 바다》민음사 p.105
그러나 노인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모든 걸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 네가 그 고기를 죽인 것은 다만 먹고살기 위해서, 또는 식량으로 팔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자존심 때문에, 그리고 어부이기 때문에 그 녀석을 죽인 거야. - p.107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자꾸만 아빠가 떠올라 화가 났다.
80일이 넘는 기간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아오지 못했으면서 매일 같이 바다로 향하는 노인.
본인의 배보다 더 큰 청새치를 잡고야 말겠다고 몇 날 며칠을 표류하는 노인.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배에 묶어놓은 청새치를 절대 놓아버리지 않는 노인.
닥쳐올 불운을 알면서도 배를 모는 노인.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계속 생각만 하는 노인.
노인의 모습에서 자꾸만 아빠가 보였다. 자존심 때문에, 직업이기 때문에, 노인도 아빠도 언제가 끝일지 모를 어깨춤을 어깨가 빠져라 추고 있었다.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게 되거든. - p.34
“저게 뭐죠?” 여자가 웨이터에게 물으면서 이제 조류를 타고 바다로 밀려 나가기를 기다리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그 엄청나게 큰 고기의 길쭉한 등뼈를 손으로 가리켰다. - p.127
노인이 그토록 고군분투하면서도 청새치를 놓아버릴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5.5m라는 훈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더 이상 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대어를 낚을 준비와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자기 자신과 사람들의 인정. 그러나 그 훈장은 결국 쓰레기가 되어 버렸다.
간결한 문장으로 읽는 내내 가쁜 호흡을 이어가던 소설이, 유독 마지막 부분, “엄청난 고기의 길고 흰 등뼈”를 묘사하는 장면에 접어들자 구구절절해진다. 이 늘어짐이 나와 같이 노인의 전투를 납득하고 싶지 않은 독자를 향한 변명이자 미련처럼 느껴졌다.
아빠의 보험금도 청새치의 등뼈 같다. 물론 돈 중요하다. 하지만 아빠가 죽고 난 뒤에 나에게 억만금이 주어진다 한들 그게 내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꾸역꾸역 적립한 아빠의 사망 보험금보다 아빠의 윤택한 하루가 더 고프다.
“이젠 할아버지하고 같이 나가서 잡기로 해요.”
“그건 안 돼. 내겐 운이 없어. 운이 다했거든.”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운은 제가 갖고 가면 되잖아요” 소년이 대꾸했다.
아빠가 이제 내 삶을 내게 맡겼으면 좋겠다.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나를 위해 보험을 들 것이 아니라 아빠를 위해 빚을 갚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동료들의 인건비를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세금 독촉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가올 상어 떼나 만반의 준비 같은 것들에서 벗어나 운 좋은 소년과 수다스러운 낚시를 했으면 좋겠다. 아빠가 노력해봤자 나는 재벌 2세밖에 될 수 없다. 유산은 길고 흰 청새치의 등뼈다. 아빠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재벌 1세를 꿈꾼다.
이 작품이 왜 이렇게까지 뛰어난 평가를 받는지 아직도 갸우뚱하다. 애써 공감해보고자 내리 세 번을 읽었고, 덕분에 얻게 된 것은 아빠의 삶이 대략 이런 모양이지 않을까 하는 얕은 이해랄까? 아빠가 자꾸 보험에 가입하는 이유를 알았고, 술 없이 잠들지 못하는 이유를 알았다. 마음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벽 일터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이유를 알았다. 이 정도면 충분한 듯도 하다.
《노인과 바다》를 읽고 벅차오르기엔 아직 내가 너무 어리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어쩌면 나이 때문이 아닐 수도 있겠다. 읽은 소설이 몇 권 되지도 않는 주제에 감히 고전에 도전한 하룻강아지의 최후였을지도. 노인이 바다가 되고 아빠가 되고 내가 되려면 나는 검은 바다에 몇 번을 더 나가봐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