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의 그윽한 행복을 위해

by 현율


뜨겁게 젖은 공기를 삼키며 불 같은 7월 더위를 실감하는 오후. 대형서점 내부를 배회하다 습관처럼 시집 코너에 제일 먼저 다가선다. 출판계 통틀어서 시집이 베스트셀러였던 시문학의 황금기는 오래전에 갔다고 하지만, 여전히 한국 문단에는 스타급 시인들이 존재한다. 몇 권의 시집들을 펼쳐보다 새삼 높아진 가격에 흠칫 놀란다. 여러 가지 이유로 시집 한권이 1만원을 넘어선 건 이미 몇 년 전 일이다. 과거 출판사들의 시인선들은 상대적으로 부담 없는 가격 덕분에 지갑이 얇은 이들에게 문학을 접할 수 있는 최종 보루와도 같았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되레 내 손은 들고 있던 시집들을 제자리에 꽂아 놓는다.


몇 권의 책을 가방에 넣고 서점을 나와 주변 식당가를 두리번거린다. 손가락 하나만 까닥여도 땀이 흐르니 발걸음은 본능처럼 ‘평양냉면’이 적혀 있는 식당 쪽으로 움직인다. 불볕더위라지만 한적해진 도심은 후미진 구석마다 눈부신 햇살이 포만하고, 거리에는 청록색 가로수와 끝 모르게 솟아오른 뭉게구름이 선명한 채도로 채워져 있다. 내 손바닥보다 넓은 버즘나무 잎들은 미풍에 느린 춤을 추고 있고, 매미들은 도심 소음보다 더 큰 소리로 누군가를 찾고 있다. 모든 생명체들이 최선을 다해 꿈틀거리는 7월의 여름은 충분히 아름답다. 이전에 없었고, 미래에도 볼 수 없을 눈부신 장면들이다. 하지만 아름답기엔 너무 뜨거운 한낮이다. 시원한 공간에 앉아 유리 너머로 이 풍경을 만끽하고 싶어진다. 식당에 들어서자 시야에 처음 들어오는 건 에어컨 바람보다 서늘한 냉면 가격이다. 시집들이 눈물을 머금고 가격을 올리는 판에 하물며 냉면이야 저렴한 가격을 참을 수 있었겠는가. 입구 옆에 성긴 자세로 서서 짧은 생각들을 떠올린다. 시집보다 비싼 냉면을 찾는 배고픈 욕망이라니. 그래도 대를 이은 냉면집 주인의 손맛이라면 그렇게 비루한 욕망의 대상은 아니지 않나. 이런 마음 한 구석에 다시 꽂아놓았던 그 시집들이 앉을 자리는 없었나. 냉면 한 그릇에 이 무슨 실존주의적 갈등인가 싶어 어색한 미소를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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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에어컨에서 미약한 바람이 근근이 새어나오는 분식집에 자리를 잡는다. 테이블 위에 방금 서점에서 들고 온 두 권의 시집을 올려놓는다. 김밥과 라면으로 차린 만찬을 함께 할 예정이다. 한 권은 풋풋한 신인 작가의 생기 넘치는 문장들이 표지를 들썩이게 만든다. 또 다른 시집은 문단의 아이돌이라 불리던 그가 수년 만에 가져온 신간이다. 냉면에 욕망 타령하다 이 여름 뜨거운 라면 국물이라니. 입안을 가득 채우는 차가운 냉면 육수와 메밀향이 허락해줄 행복이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새 책을 열어젖힐 때 풍기는 비릿한 종이 냄새, 사람 손이 처음 닿는 순간의 칼날 같은 모서리. 이 감각들을 차가운 냉면 대신 지금의 나를 채우는 욕망으로 내세우고자 한다. 냉면으로 채울 수 있었던 행복은 순간이지만, 오늘 이 시들은 잠들기 힘든 여름밤들을 사유와 그리움으로 슬며시 채워나갈 터이다.


시 한 구절은 때로 삶을 이어나갈 기운이 되고, 암울한 현실을 낙관의 시선으로 바라보게도 한다.


연안에 내리는 눈들은 좋겠다

내리자마자 바다가 되니까

- 박준, <눈> 中. [마중도 배웅도 없이] p.64 (창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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