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연말 ‘계엄’이란 단어가 한국 사회를 휩쓸고, 그들만의 세계라고 생각했던 정치 영역에 많은 이들이 촉각을 세우던 날들이 이어졌다. 대통령이 예정에 없던 일정으로 바뀌었고 이른바 ‘실용’과 ‘일을 잘하는’ 것에 대한 논제들이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낯설지 않은 단어들인데, 왜 새삼 이런 용어들이 새로운 시대를 대변하는 어감으로 공유되고 있을까.
어리석고 사리판단도 할 줄 모르는 내가 나라의 대업을 이어받긴 했지만, 나는 지혜도 모자라고 현명하지도 않다. 깊은 못과 살얼음을 건너야 하는데 건너갈 방법을 모르듯,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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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요령 있게 공적을 이룰지 모르겠다. 이 네 가지 외에 지금 당장 시급하게 힘써야 할 것으로 또 무엇이 있겠는가?
- 김태완, [책문] (소나무, 2004)
겸손하고 자상한 투의 이 질문을 내린 이는 뜻밖에도 광해군이다. 1611년 광해군 3년. 별시문과에 합격한 이들에게 최종 관문이 눈앞에 있었다. 이른 바 ‘책문(策文)’이다. 합격은 했으나 이들에게 서열을 부여하기 위해 임금 앞에서 치르는 마지막 시험인 셈이다. 임금은 주로 정세나 국가 현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시험 응시자는 자신의 의견으로 답을 제출하는 것이 책문이다. 국가 정책들이 대부분 주제를 이루지만, 때로는 철학적이거나(그대가 공자라면 어떻게 정치를 하겠는가 – 중종), 심지어 문학적이기까지 했다.(섣달 그믐밤의 서글픔, 그 까닭은 무엇인가 – 광해군)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개정판 제목은 [책문, 이 시대가 묻는다])는 이러한 책문의 다양한 사례를 모아서 현대에도 통용될 법한 질문과 답을 제시한다. 책문에 답한 글들의 내용을 보면 놀랍도록 논리정연하고 박학한 합격자들의 수준을 체감할 수 있다. 때로 과감하고 공격적인 답들도 볼 수 있는데, 앞서 언급한 가장 시급한 정책을 묻는 광해군의 질문에 답한 임숙영(1576~1623)의 글이다. 임숙영은 서문에서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대답하겠”다고 적는다. 그는 사대부의 붕당, 조상의 업적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점, 중궁(왕비를 비롯한 내명부)의 청탁 비리, 직언이 막힌 언로 문제, 불공정한 인재 발탁 문제 등을 적시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문제는 왕 당신에게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더해 그는 왕이 책문에서 더 중요한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직격탄을 날린다. 서슬 퍼런 광해군에게 올린 답이 이 정도였으니 그는 무사했을까? 실제로 훗날 임숙영은 광해군의 중요한 결정 과정을 외면한 탓에 파직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흔한 처세나 성공론과 달리 일 하는 것에 대한 조금 다른 시각을 보여준 책이 한 권 있었다. 철학과 미술사를 전공하고 경영컨설팅 경력을 가진 야마구치 슈가 구스노키 켄과 함께 쓴 [일을 잘한다는 것](리더스북, 2021)은 이른바 ‘감각(sense)’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책은 일을 잘 하는 사람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해석을 시도한다. 특이하게도 논리적 사고나 부지런한 자기 연마, 단기와 중장기적 목표 등의 뻔한 시각에서 벗어나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꺼낸다. 굳이 우리 사회에서 비슷한 용어를 찾자면 ‘일머리’가 될 수도 있고 좀 더 단순화하자면 ‘눈치’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일머리와 눈치로 설명하기엔 저자들이 말하는 ‘감각’은 조금 더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다.
"전방위적으로 감각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 감각이 있는 사람은 그저 감각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감각을 발휘할 자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직감이 실로 뛰어나죠. 처음에 망설여진다면 일단 해보고,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하고 생각되는 분야에서는 손을 떼는 상황 판단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다'하는 감각이 점차 뚜렷해집니다. 물러날 때와 나서야 할 때를 아는 것, 이 또한 일을 잘 하는 사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인 면에서든 ‘실용’이 각광받는 가치관으로 올라서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추앙받는 ‘실용’이 단순한 ‘쓸모 있는’ 무언가를 언급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임숙영보다 앞선 1609년, 증광문과에서 광해군은 ‘지금 이 나라가 처한 위기를 구제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를 책문에 넣었다. 이에 답한 조위한(1567~1649)은 왕들의 실책과 그에 따른 폐단을 거침없는 사례로 들고 “도끼에 맞아죽을 각오로” 겉만 번지르르한 문구에 그친 10가지 시책들을 언급한다.
무언가를 실용적으로 잘 한다는 것은 피해야 할 것, 버려야 할 것들을 감각적으로 잘 판단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부터일지 모른다. 임숙영이나 조위한처럼 목숨을 걸 용기는 없더라도 그런 ‘감각’만큼은 가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