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의 형상
독자들은 소설의 첫 문장을 어떻게 읽을까. 많은 이들이 소설 전반에 대한 느낌을 첫 문장에서 가져오곤 한다. 작가들이 작품 첫 문장에 혼신을 다하는 이유가 이 때문일 수도 있다. 1964년 발표된 김승옥의 <무진기행>에는 소설 마지막 무렵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작가는 이 한 문장에 작품의 주제와 인물 감정의 흐름, 심지어 결말까지 응축시켜 놓았다. 그러나 <무진기행> 전반의 분위기는 소설의 첫 문장에 그대로 담겨 있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알려진 것처럼, 소설 속 ‘무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다. 작가는 인물이 현실을 도피하는 장소로 ‘무진’이라는 외진 곳을 설정했는데, 이 문장은 독자로 하여금 시작부터 이 가상의 공간을 생생한 현실로 수용하도록 한다. 아울러 등장인물이 이 공간에 진입하면서 벌어질 일들에 대해 궁금증을 자아내는 장치로도 제 몫을 한다.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다는 마지막 문장은 이 첫 문장과 결합해서, 묵직하고 불쾌하며 모순이 가득한 현실의 감정들을 독자들의 가슴에 새겨놓는다.
1944년 발간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집 [픽션들]에 수록된 <칼의 형상>은 다음과 같은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원한 서린 흉터 하나가 그의 얼굴을 가르고 있었다. 관자놀이에서 시작해 턱의 광대뼈로 이어진 잿빛의, 거의 완벽한 활 모양을 가진 흉터였다.
‘원한, 얼굴을 가르는 완벽한 흉터’가 들어간 이 하나의 문장은 독자의 시선을 마지막 구절까지 한 숨에 이르도록 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보르헤스가 이 문장 하나에 거의 모든 서사와 사건들을 모아놓았다는 기분이 들게 된다. 보르헤스의 소설들은 편하고 느긋하게 읽기 어렵다. ‘환상 사실주의’로 언급되는 것처럼 그는 허구와 현실을 수시로 뒤섞고, 과감한 은유를 빈번하게 구사한다. 민음사가 1994년 번역가 황병하 선생 작업으로 펴낸 보르헤스 전집을 읽다보면 수많은 주석들을 보게 된다. 심지어 어떤 페이지는 본문보다 주석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경우도 있다.
<칼의 형상>은 많은 보르헤스의 단편소설들처럼 극도로 짧은 분량의 작품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짧은 소설에 액자 형식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영국과 아일랜드 간 피의 역사를 배경으로 사용하며 저자 특유의 은유를 가득 채워놓았다. (에드거 앨런 포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진) 보르헤스는 추리소설 기법의 형식에도 능숙해서, 독자들은 소설의 끝 무렵 예상을 뛰어넘는 화자 뒤바꾸기에 짧은 탄식을 하게 된다. 이 분량의 소설 내부에 이런 장치들을 구사하는 것은 보르헤스라서 가능한 작업이다.
<칼의 형상>은 아일랜드 독립군과 영국간의 전쟁을 소재로 한다. 치열한 전투와 생사를 오가는 시간의 흐름이 얼마나 긴장감을 높이는지 공감하기 위해서는 아일랜드와 영국 간 죽음의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류사에 지독하리만치 잔혹한 전쟁과 학살의 흔적들은 곳곳에 포진하고 있지만, 19세기 중반 아일랜드의 역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처참했다.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이 사실 조차 슬픈 역사를 배경으로 하지만) 아일랜드에 1879년부터 3년이 넘도록 잔혹한 기근이 이어진다. 아일랜드를 지배하던 영국은 결국 구휼을 외면했고, 이 시기 아일랜드 전체 인구의 25% 가량이 소멸됐다. 이러한 배경을 기반으로 <칼의 형상>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인물들의 서사가 막판에 극적으로 전환되는 시점까지 한 숨에 이어진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처럼 첫 문장과 기묘하게 결합된다.
소설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이어보는 일은 단편소설에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 카뮈의 <이방인>이 가진 첫 문장(‘오늘 엄마가 죽었다.’) 역시 마지막 문장과 함께 비춰보면, 소설 전체를 돌아보기에 흥미로운 시선이 될 수 있다.
문학을 즐기기 위해 문장 수집가가 되어보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들에는 작가들의 농축된 창작의 열정과 영혼이 담겨있다. 우리가 그 많은 문장들을 기억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첫 문장 (다산책방,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