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삽화가 있는 책을 좋아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19세기 삽화가 들어간 소설책을 좋아한다. 수집이라는 취미와 거리가 먼 삶을 살지만, 예외가 있다면 좋은 삽화가 있는 책 모으기에는 흥미를 느낀다. 약 20년 전 출판사 열림원이 번역가 김석희님과 함께 ‘쥘 베른 컬렉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소식이 내게 솔깃했던 이유는 뛰어난 번역가를 중심으로 한 작업인데다, 무엇보다 최초 출판 당시의 꽤 많은 삽화들이 그대로 사용되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천재라고 일컫는 프랑스의 폴 귀스타브 도레(Paul Gustave Doré, 1832–1883)는 삽화를 출판의 부가적 가치 이상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도레의 삽화는 <돈키호테>를 필두로 일찌감치 유럽 출판시장을 흔들어 놓았고, 그의 삽화는 출판물의 성공 여부를 주도하기까지 했다. 그런 도레와 함께 했던 제자들(에두아루 리우 등)이나, 동시대 쟁쟁한 삽화가들의 작품이 쥘 베른 소설들 곳곳에 사용되었고, 열림원의 쥘 베른 컬렉션에도 실리게 된 것이다.
상당수 이미지 작업이 디지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현대와 달리, 19세기 출판작업에 있어 삽화 제작은 철저히 손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하나의 예술작품 창작이 아닌 대량 인쇄를 전제로 하니, 모든 삽화는 대부분 판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예술적 재능은 물론이고 목판, 석판에서 동판까지 고되고 숙련된 작업이 따라야 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환경을 전제로 귀스타브 도레가 어느 정도 대단한 인물이었는지는, 그의 작품들을 보면 쉽게 수긍이 간다.
독자는 텍스트를 읽으며 저마다의 기대와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 속 장면들을 상상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읽다보면 상상의 범주가 극대화되곤 한다. 인물의 심리를 치밀하게 배열하고 급격하게 전개되는 사건들을 숨겨진 단서들과 함께 포진해놓으면, 독자는 서서히 상상의 성을 구축하게 된다. 그러다 페이지를 넘기면 현실이 되어버린 어떤 장면을 그림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2021년 번역가 김석희님과 함께 발행한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에는 삽화가 아서 래컴(Arthur Rackham, 1867-1939)의 작품들이 담겨있다. 아서 래컴은 영국 고전이나 동화 삽화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포의 소설들 속에서는 독자가 상상한 이미지를 소설 속 문장들과 강하게 결합시켜 준다. <모르그가의 살인> 속 결정적 그 장면을 상상하던 독자가 이 삽화를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문학작품 속 삽화가 주는 이미지의 영향은 예상보다 훨씬 크다. 존 밀턴의 <실낙원>은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를 통해 수없이 인용되고 있다. 대중들에게 <레미제라블>의 상징적 이미지로 각인된 어린 코제트의 얼굴은 쥘 베른 작업에도 참여했던 에밀 바야르(Emile Bayard, 1837~1891) 삽화 중 일부이다.
쥘 베른 컬렉션 속의 삽화들은 이런 향연을 제대로 누리게 해준 작품들이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한 지금은 더 이상 출판물 속 이미지를 위해 판화 같은 원시적 작업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들의 고된 노동이 결합된 삽화를 만나는 것은 여전히 행복한 일이 분명하다.
덧붙임 - 파주 헤이리에 위치한 한길책박물관은 올해 말까지 [천재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전을 기획 전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