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씨는 새벽부터 신중하게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6시 30분. 서두를 필요는 없다. 그가 좋아하는 우유와 설탕을 많이 탄 커피를 마시며 조간신문을 절반쯤 훑어볼 여유도 있다.
- 망하거나 흥하거나. 아니지. 흥하거나 망하거나. 아니야. 흥해야지.
그는 중얼거리며 평상시 입지 않던 흰색 셔츠를 꺼냈다. 단추를 아래부터 위로 하나씩 채워나갔다. 아침 습관과는 반대로 컵에 뜨거운 우유를 먼저 따른 후 커피와 설탕을 넣었다. 티스푼으로 컵의 가장자리를 툭툭 건드리는 시도도 해보았다. 친구들은 이름이 대출이라 항상 돈이 부족한 것이라고 놀렸다. 하지만 그는 크게 출세하라고 부친이 지어준 이름 속 좋은 운을 믿고 있다. 오늘은 그 운이 작동할 것이다. 한 번도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오늘 같은 날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가 20년 전 식품공장을 세운 후 내내 숨죽였던 그 운이 잠시 후 해가 뜨며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컵에서 실안개 같은 김이 피어오르다 사라지는 것을 보며, 대출씨는 명색이 중소기업 사장인데 운 타령만 하고 있는 것이 조금 계면쩍게 느껴졌다. 출근하면 영업 담당 박이사가 작년 가을부터 준비한 대형 급식업체와의 첫 계약 여부를 보고할 것이다. 거래는 무난히 성사될 것이 분명하다. 위생안전 실사는 이미 여유 있게 통과했다. 작지만 새로 지은 김치공장도 모든 게 완벽해보였다. 품질과 가격도 요구하는 수준에 맞췄다고 귀띔을 받았다. 모두 박이사가 노력한 덕이다. 대출씨는 새삼 박이사가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번 계약을 위한 투자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고, 그의 운은 영원히 잠들어 있을게 분명했다.
- “띠링”
정적을 깨는 문자수신 소리에 대출씨는 움찔하며 들고 있던 컵을 흔들었다. 깜짝 놀라 튀어나온 우유커피가 그의 흰색 셔츠 소매에 연노란 얼룩을 만들었다. 평상시와 달리 전화기를 엎어놓아 누가 보낸 것인지 알지 못했다. 아직 7시 전이다. 박이사가 벌써 계약통보를 받은 것인가. 무엇보다 이 시간에 계약불발 소식이 올 리는 없다. 누가 염치도 없이 나쁜 소식을 새벽부터 보내겠는가. 하지만 대출씨는 생침을 연달아 두 번 삼키며 마른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 ⌜사장님. 출근하시면서 커피믹스 두 박스 정도 부탁드립니다. 법인 운영계좌 사정 때문에 좀 그렇습니다.⌟
관리팀 정대리의 메시지였다. 회사에서 가장 나이 어린 계약 직원이다. 그는 대출씨를 포함해 누구의 핀잔이나 잔소리에도 주눅 들지 않는 ‘예의 없는 엠지’로 불린다. 여드름 자국이 선명한 얼굴에다 퉁명스런 말투 탓에 그에게 다정한 직원들은 거의 없다. 그는 메시지를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 이 상황에 커피믹스라니. 게다가 ‘좀 그렇습니다’는 또 무슨 바보 같은 표현이란 말인가.
대출씨는 승용차 시동 버튼을 눌렀다. 네비게이션이 켜지고 매일 그를 회사로 이끌던 빠른 경로가 화면에 표시됐다. 그는 화면을 응시하다 다이얼을 돌려 지도를 축소했다. 그가 출근을 위해 건너야 할 회청색 한강 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강물은 남쪽과 북쪽 방향으로 번갈아 흐르다 어느 지점에서부터 위를 향해 곧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망설이거나 쉬어가며 흐르다 강물은 그곳에서 어떤 결심을 한 것인지 곧고 빠르게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그 지점에 동작대교가 있었다. 대출씨는 오늘 동작대교를 건너 한강을 지나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멀리 돌아가더라도 회사에는 여유 있게 도착할 테니 문제없을 것이다. 3월 하순의 아침공기는 차가웠지만, 청량했다. 햇살은 조금씩 위로 올라서며 모든 사물에게 공평해지고 있었다. 대출씨는 정대리의 문자메시지만 빼고는 꽤 그럴듯한 아침이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이 출근길을 ‘아름다운 경로’라고 부르기로 했다.
두 번째 문자메시지 알림이 울린 건 대출씨의 승용차가 동작대교에 막 들어서던 때였다. 정대리가 아니길 바라며, 조수석에 놓아둔 휴대폰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박이사였다. 박이사의 문자메시지라는 사실만으로도 대출씨는 온화한 긴장감을 느꼈다. 오늘만큼은 모든 것이 그가 원하는 흐름대로 움직인다고 확신했다. 동작대교로 올라서며 한강의 넓은 수면이 펼쳐졌다. 그 위에 눈부신 봄 햇살이 축복하듯 내리고 있었다. 대출씨의 차는 이제 동작대교 위에서 일직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대출씨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속도를 늦췄다. 앞을 보며 더듬거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잡으려던 순간,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장면과 마주했다.
그녀는 제법 높은 다리 난간 위에서 강 쪽을 향해 걸터앉아 있었다. 양 팔을 옆으로 내려 두 손은 난간 위에 올려놓은 채였다. 두 다리는 자연스럽게 접어 살짝 겹친 발목들이 난간에 닿아 있었다. 그녀는 찡그림도 없이 태양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갸름하고 하얀 얼굴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봄 햇살과 이른 아침 안개를 머금은 바람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을 들추어내며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왜 저렇게 위험한 자세로......“ 이런 생각을 하던 대출씨의 시선으로 밀고 들어온 것들이 있었다. 검은색 배낭모양 가방이 난간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고, 짙은 갈색 겨울 점퍼가 네모반듯하게 개어져 있었다. 그 위에는 하얀색 운동화가 햇살이 뿌려지는 강을 바라보며 나란히 놓여 있었다. 대출씨의 차는 이미 그녀를 지나쳤다. 울컥대며 튀어 오르는 맥박 탓에 조수석의 휴대폰을 제대로 잡기 어려웠다. 옆 거울로 그녀를 다시 확인했다. 그녀가 그 자리에 없었다.
- 119입니다.
- 사람이, 떨어졌어요. 아니, 다리에서 투신했어요. 여기, 동작대교입니다.
- 동작대교에서 사람이 투신했다는 말씀이시죠! 언제인가요?
- 지금이요. 강북 방향으로 가는 길에……. 지금 봤습니다.
- 지금 동작대교 남단에서 북단 방향으로 가는 중 사람이 투신하는 것을 목격하셨다고요. 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휴대전화 위치 조회 들어갑니다.
대출씨의 차는 멈추지 않고 다리에서 나와 인적이 드문 도로로 들어섰다. 그는 차를 갓길에 세우고 텅 빈 눈동자로 3월의 눈부신 햇살을 응시했다. 모든 것들이 고요했지만, 대출씨의 맥박은 여전히 숨가쁘게 뛰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 ⌜[Web발신] 119에서 긴급구조를 위해 귀하의 휴대전화 위치를 조회하였습니다.⌟
그 밑에 박이사의 읽지 않은 메시지가 굵은 글자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흔들리는 손가락으로 박이사의 메시지를 열었다.
- ⌜사장님. 죄송합니다. 계약 실패했습니다.⌟
대출씨는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박이사의 문자와 셔츠 소매의 커피 얼룩을 침묵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모르는 번호가 화면에 뜨며 전화벨이 울렸다.
- 구조대입니다. 동작대교 남단에서 북단 방향으로 이동 중 투신사고 목격하셨다고요.
- 예. 맞아요.
- 위치 정확히 기억하십니까? 난간 기둥에 핀 번호라든지.
- 아니요. 모르겠어요. 다리 위 그 자리에 그 분의 짐들이 있습니다.
- 투신사고 위치에 사고자 짐이 있다구요? 지금 출동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의 말투와 문자들은 박이사의 것과 같이 간결했다. 그러나 대출씨 눈에는 그녀의 하얀 얼굴에 비추던 햇빛, 깃발처럼 나부끼던 머리카락이 잔상이 되었다. 고아하게 개어놓은 외투와 앞으로 나아가길 멈춰버린 운동화는 그 자리에 지금도 있을 것이다, 타인은 알 수 없는 응어리들이 수없이 엉긴 채 담겨졌을 가방은 주인을 떠나보낸 강을 내려 보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지금 대출씨에게는 한마디의 설명과 한 줄의 글로 남겨지고 있었다. 계약에 실패했다는 박이사의 글과 함께.
- ⌜[Web발신] 구조대 차량이 동작대교 북단 방향으로 출동하였습니다.⌟
대출씨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며 인적이 드문 곳인지 다시 확인했다. 창문이 모두 닫혀있어도 조금의 틈이 있을까 닫힘 버튼을 당겼다. 운전석 의자를 뒤로 빼고 고개를 아래쪽으로 숙였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울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대출씨의 가슴 속에 기이하게 엉켜 뭉쳐진 덩어리를 송두리째 토해내는 것이었다. 대출씨는 악을 쓰고, 울부짖으며 더 이상 가슴에서 아무 것도 나올게 없을 때까지 끊임없이 뱉어냈다. 눈물과 콧물이 그의 코끝에서 만나 베이지색 카펫으로 떨어져 검은색 원을 만들었다.
오전 10시가 다 되어 대출씨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작은 건물 제일 위층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경기도 끝자락에 위치한 공장을 제외하고 이곳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10명 남짓이었다. 직원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관리팀 정대리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스프레이 세제와 마른 걸레를 들고, 비어있는 책상들을 연신 문지르고 있었다. 사무실 창문들은 모두 열어놓았다. 대출씨는 햇빛이 들지 않는 구석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그의 방으로 걷다 정대리에게 말을 건넸다.
- 박이사는?
- 모르셨어요? 어제 퇴근하면서 며칠 휴가 다녀올 거라고 했는데…….
정대리는 특유의 무표정에 무심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얼마동안 청소를 하고 있었는지, 얼굴은 붉어져서 여드름 흉터가 더 선명해 보였다. 걸레를 든 손등에는 핏줄이 돋아 있었는데, 바쁜 와중에 중요한 얘기 아니면 자기 할 일 해야겠다는 태세였다.
- 뭐하고 있는건가?
- 봄이기도 하고, 오늘 왠지 휴가인 사람들이 많아서 사무실 청소 좀 시작하려고요. 저, 커피믹스는...
- 차 트렁크에 있어. 이따가.
대출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대리는 돌아서서 책상을 문지르고 있었다. 낡은 책상 위의 묵은 얼룩들은 쉽게 지워질 리가 없었다. 열려진 창문들 사이로 햇살이 밀려 들어와 사무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정대리가 어깨를 들썩일 때마다 부유하던 작은 먼지들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그가 방금 닦아낸 빈 책상 하나가 뽀얀 햇빛을 대출씨의 얼굴에 비춰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