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은 서둘러 폭포로 몸을 던지지 않아.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며 돌아온 길을 바라보다 미끄러지지.
남자는 퇴근 5분전에 자신이 더 이상 회사에서 일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년퇴직 시기는 작년 이맘때 이미 도래했었다. 플라스틱 사출성형을 하는 회사는 그의 노쇠한 경험과 손기술이 여전히 필요했고, 그는 몇 달씩 계약을 연장해가며 하던 일을 이어왔었다. 인사팀 김과장은 커피 한 잔 하자더니 그를 공장 뒤편 커피 자판기 옆으로 데려갔다. 커피가 한 모금 가량 남은 종이컵을 천천히 돌리며 더 이상 자신도 방법이 없다고 했다. 남자는 김과장이 말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종이컵 바닥에 남은 커피에만 시선을 둘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김과장은 남은 커피 위에 담뱃재를 털며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말과 함께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날 밤늦게 직장에서 돌아온 딸에게 남자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는 소식을 그대로 얘기해주었다. 딸은 알아듣는 눈치였다. “오늘 기 막힌 날이네 아빠.” 딸은 미소를 짓고 몸을 빙그르 돌리더니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나도 오늘 잘렸거든.”
다음 날 남자는 20년을 넘게 살아온 집을 팔기로 했다. 가진 돈보다 더 많은 빚을 내서 이 아파트를 살 때 그는 이 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겠노라고 마음먹었었다. 아내는 남들은 잘만 하는 부동산 재테크 하나 제대로 못하냐고 했었지만, 경기도 외곽 2개동짜리 아파트가 미래에 더 비싸질 것이라는 믿음은 애초에 없었다. 아파트를 팔게 된 것은 딸의 결정이었다. “아빠, 우리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가서 살면 안 될까? 난 이제부터 프리랜서로 일할 거라서 출근은 가끔씩만 해도 되거든.” 딸은 프로그래머이다. 게임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수년전 대학을 졸업하고, 판교에 있는 큰 게임회사에 취업이 되었다고 활짝 웃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 후 딸이 자기 일을 얘기하며 기뻐하는 얼굴을 본 기억은 없다.
“요리를 해야겠어.” 겨울옷들을 모아서 종이박스에 담던 딸이 거실바닥에 주저앉아 천정을 바라보고 이야기했다.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딸을 잠시 쳐다보았지만, 다시 하던 일을 계속 했다. 이사 트럭이 내일 아침 7시에 오기로 했으니, 오늘 내에 짐을 다 꾸려야 했다. 어제 아파트 상가의 식자재 마트에서 종이박스를 십여 개 들고 왔는데, 운 좋게도 딱 맞는 숫자였다. 어차피 옷가지와 약간의 책들을 제외하면 박스 두어 개에 들어갈 잡동사니들이 전부여서 어두워지기 전에 마무리될 것 같았다. 딸의 짐들은 남자의 것보다 많긴 했지만, 20대 후반 여자아이 짐이 마트에서 주워온 라면박스 5개를 채우지도 못했다. 집안에 있는 모든 가전제품과 가구는 딸이 사용할 작은 책상 하나를 제외하고는 중고로 팔거나 내다버렸다. 남자의 유일한 자산이었던 24평 아파트는 내일 타인의 소유가 될 것이고, 남자와 딸은 경기도와 충청도 경계선 어딘가에 빌트인 가구들로 채워진 전셋집으로 옮길 예정이었다.
“갑자기 안하던 요리는 왜? 부엌에 있던 물건들은 저 박스에 이미 다 넣어버렸어.” 조리도구라고 하기에도 소박한 몇 가지 주방 소품들은 신문지에 감싸서 두 개의 박스에 담아둔 터였다. “우리 이제 좀 인간답게 살아야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식사는 밖에서, 주말에는 늦잠 후에 저렴한 메뉴 찾아서 외식.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이제.” 딸의 얼굴을 망연히 바라보던 남자의 명치끝에 “이제”라는 단어가 들러붙었다. 남자는 주섬주섬 주방 도구들이 들어있던 박스를 다시 열었다. “요리할 재료 좀 사올게.” 딸은 출근할 때 입던 모자달린 점퍼를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남자는 십년 전 아내가 이별을 선언하고 떠난 후 이 집에서 한 번도 제대로 된 밥상이 차려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오늘 아침 식탁을 중고거래로 처분한 것을 후회했다. 남자가 식탁이 있던 자리에 신문지를 펼쳐놓는 동안 딸이 요리할 재료를 사들고 돌아왔다.
“파프리카?” 남자는 딸이 주방에 쏟아내는 식재료들 사이에 노란 파프리카가 굴러 나오는 것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딸은 파프리카를 절대 못 먹거니와 혐오하는 수준이었다. 털 없는 동물의 근육을 연상케 하는 모양에다 야채와 과일 경계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맛은 참기 어려운 비린내를 풍긴다고 했다. 어릴 때는 아내가 못 된 편식 습관이라고 달래다가 화를 못 누르고 딸의 등을 후려친 일도 있었다. “건강에 좋대. 이제 가리지 않고 먹을 생각이야.”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는 일과 십여 년만의 제대로 된 밥상이 집 떠나기 전날 바닥에 펼쳐놓은 신문지 위에서 펼쳐질 참이었다.
요리를 해본 적이 없는 남자의 눈에도 딸이 사온 식재료들은 어색한 조합이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케이스 위에 수정된 가격표가 세 번 덧붙여진 광어회, 즉석밥, 스파게티 면과 병에 담긴 주황색 소스, 캔 맥주 두 개와 노란색 파프리카였다. 딸은 박스에서 꺼낸 양푼에 설탕물을 조금 만들고 소금과 식초를 섞더니 식은 밥을 부어 초밥을 만들었다. 밥을 뭉치고 광어회를 한 점씩 올리려다 와사비를 깜박했다며, 다시 박스를 뒤져 언제부터 있던 것인지 모를 핫소스를 꺼내들었다. “아메리칸 스타일이야. 아메리칸 칠리 스시.” 딸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주 오랫동안 딸은 남자의 거울이었다. 아내가 자신만의 삶을 살고 싶다며 이혼이란 단어를 꺼내들었을 때, 남자는 화를 내거나 새로운 대안을 얘기하지 못했다. 딸도 며칠을 울기만 했을 뿐 그 흔한 십대의 억설이나 억지떼를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굴곡지고 비틀린 관계를 싫어하지만, 회사는 그가 변화에 유연하고 현실에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칭찬했었다. 엄마가 떠난 그 달에 딸은 영어 토론대회에서 1등 상장을 들고 왔다. 하지만 남자는 지금 그 거울이 깨졌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딸은 펼쳐놓은 신문지 위에 ‘아메리칸 칠리 스시’와 파프리카를 채 썰어 넣은 스파게티를 내려놓았다. 스파게티 접시 밑에 ⌜끝없는 내리사랑... “자녀 성패는 부모 책임”⌟이라는 기사의 머리글이 도드라졌다. 딸은 스파게티 가닥을 포크로 높이 들며 빙긋 웃었다. “원래 내가 이번 달에 승진을 했어야 했다고. 그런데 팀장 놈이 나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인간을 승진시키더라니까?” 스파게티 면들은 접시로 내려와 짧은 소용돌이를 만들더니 딸의 입으로 한 움큼 몸을 숨겼다. “해고당한 거라면서.” 남자는 딸의 입에서 들리는 파프리카 씹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물었다. “해고당하려고 팀장 책상위에 자판기 커피를 부어버렸어.” 딸이 망설이나 싶더니 우물거리며 말했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남자는 그 거울이 깨진 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해내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딸은 프리랜서로 일하며 멋진 포트폴리오를 구축해서 그 팀장을 나중에 꼭 다시 볼거라고 했다. 남자는 포트폴리오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상사의 책상에 커피를 쏟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에 엄마한테 전화했어.” 딸은 포크로 스파게티를 연신 돌리기만 할 뿐 말을 더 이어가지는 않았다. 스파게티 접시 밑 신문에 예의 기사 첫 줄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 부모 3명 중 2명은 자녀의 성공과 실패를 부모 책임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진 기사 글은 스파게티 소스로 얼룩져 읽을 수 없었다. “바쁜가봐. 조만간 밥 먹자고 하길래 바로 끊었지.” 딸이 포크로 둥글게 말아 올린 스파게티를 입에 넣었다. 남자는 딸이 하는 대로 스파게티면을 입에 넣었다. 뜨겁고 굵은 것이 명치에서 솟아올라 삼킬 수는 없었다.
스파게티를 삼키던 딸이 붉어진 얼굴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나 화장실 좀.” 남자는 화장실로 달려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못 먹는걸 억지로......” 남자는 닫힌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앉아있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한쪽 무릎만 일으켜 세웠다. “그 윽......” 화장실에서 새어 나오는 고통스러운 몸짓에 남자는 그 날, 거울에 한 줄 금이 가던 그 날을 기억해냈다. 엄마는 사라졌고, 아빠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던 시간들이 이어지던 그 어느 날, 영어토론대회에서 얻어낸 1등 상장을 들고 현관문을 들어서던 딸의 상기된 표정. “아빠, 오늘부터 나 파프리카 먹을 거야.”
화장실 문이 열렸다. 얼굴에 잔득 열이 오르고 눈매 끝에 물기가 묻어있던 딸이 웃고 있었다.
“나 토하지 않았어. 참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