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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서 Jun 14. 2024

에세이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 게임일지라도>

평범치 않은 심즈4 플레이 일지

    최근 겨울방학에 나는 번아웃에 시달렸다. 나를 일에서 떼어줄 심심풀이 땅콩을 찾다 심즈4 본편이 무료로 풀린 걸 발견했다. 심즈4는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인간과 같은 ‘심’들을 조종하여 ‘심생’을 꾸려나가는 인형놀이와 같다.

    처음엔 하우스메이트 심 셋을 만들어 다양한 직업도 가지게 하고 연애도 시켰다. <청춘시대>나 <프렌즈> 느낌이라 재밌었다. 나중에 이런 시트콤도 써보겠다는 다짐까지 생겼으나, 이내 지루함을 느꼈다. 심즈4는 DLC*를 사야지 안 그러면 재미가 없다. 본편만 무료이고 결국 추가로 돈을 쓰게 만드는 상술로 유명한 게임이었다. 하지만 나는 딱히 DLC를 사고 싶지가 않았다.

    청춘시대 심들은 청춘을 지났고 한 심은 애도 낳았다. 애를 키우는 게 특히 지루해서 대충 성장만 시키다 게임을 접기로 했다. 어차피 현실에 할 일도 많은데. 그렇게 또 번아웃의 시동을 걸던 찰나 갑자기 희한한 생각이 났다. 대충 성장시키던 자식 심의 친구로, 나를 본 딴 어린이 심을 넣으면 재밌을 것 같았다.

    그런데 심즈는 한 가구에 먼저 양육자 어른 심이 있어야 애기 심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별 생각없이 나의 엄마를 본 딴 심부터 만들었다. 그러다가 엄마 심의 유전자만으로 자식 심을 생성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배우자 심 없이도! 난 그 시스템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그게 내가 이 게임에 애정을 붙인 계기인 것 같다.


    엄마를 본 딴 청년 심(이하 E)과 나를 본 딴 어린이 심(이하 M)을 실제와 똑같지는 않지만 아주 닮게 설정하고 플레이를 시작했다. E는 프리랜서 직업군을 선택해 정해진 출퇴근 없이 일했다. M은 주어진 숙제를 다 하고도 매일 추가 과제까지 하면서 우등생으로 고속 성장함과 동시에 창의력 기술 향상에도 힘을 썼다. E는 ‘천재’ 특성이 있어서 주기적으로 사고력 기술을 올려야 되는데 혼자 일하며 애를 키우려니 그럴 시간이 잘 나지 않았다 - 이 부분에서 내가 느낀 속상함이 선명하다. M이 친구를 집에 초대하면 E는 반갑게 맞이했다. E는 줄곧 M의 사진을 찍었다. E와 M은 플레이어인 내가 어떤 지시를 하지 않을 때에도 둘이서 잘 놀았다.

    그러다가 가끔 랜덤하게 ‘E가 M을 존경함’ 같은 식으로 감정 카드가 떴는데 되게 감동이었다. 그리고 ‘M이 E를 영원한 친구라고 생각함’ 같은 게 뜨면 이 녀석, 힘들게 키우는 보람이 있네 하면서 마음이 뭉근했다.

    M은 성장해 요리도 할 수 있게 되고 글 써서 독립 출판도 하고 직장도 갖고 야망**도 여러 개씩 이루고자 질주하는 성인이 되었다. 그동안 중년이 된 E는 M이 성공하길 바라는 야망 하나만으로 여전히 열심히 일하고 M을 열심히 챙겼다. 나는 그때 플레이를 그만두었다. M이 청춘을 지나며 점차 성공해서 자그마한 집을 벗어나 거대 저택을 구매하고 좋은 남자 심도 만나는 시점까지 할까 했는데, DLC를 사지 않고는 그렇게 오래 플레이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말이야, 내가 지금 서 있는 시점 너머의 미래는 현실에서 이루고 싶은 마음일지도 몰랐다.


    심즈가 어떤 게임인지 아는 사람들은 방금까지의 글이 웃길 수도 있다. 심즈는 온갖 자극적인 막장 플레이가 가능한 게임이니까. 보통은 심즈를 하다가 이런 보드라운 감동을 느끼지 않을 테다. 내가 감동을 의도한 것도 아니라는 게 진짜 웃긴다. E와 M의 성장을 플레이하는 게 그냥 너무 재미있는데, 난 그런 재미 속에서도 속절없이 엄마와 나의 궤적을 읽었다.

    겨울방학 이후로 다시 바빠져서 요즘 게임할 시간이 없다. 심즈를 삭제한 지금도 나는 진심으로 E와 M의 행복을 빈다. 한낱 게임일 뿐인데 그 둘은 어쩐지 심생에 최선을 다할 것 같아서. 그 치열한 매일에 내가 작은 응원을 보태고 싶어서. 나는 다른 차원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입장이고 그들에게 motherload*** 치트를 써주지도 않은 채 떠났지만.

   여기서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면? 그렇다면 나를 만들고 조종하는 누군가는 별별 위기를 내 삶에 심어놓고 돈 치트키도 쓰지 않는 고지식한 플레이어다. 혹은 어떤 지시를 해도 내가 자기 자유의지대로 행동해서, 이미 나라는 캐릭터에서 손을 뗐거나.

    이 삶이 사실 게임 속이라면 나는 어떻게든 현실로 나가 플레이어를 찾아내겠다. 처음에는 불만을 토로할 것 같다. 나에게 왜 이런 설정들을 줬어? 훨씬 쉬운 길이 한참 많은데. 왜 그랬어? 걔가 무슨 대답을 하든 나는 또 내 멋대로 근데, 됐어, 나는 이 삶이 딱 좋거든, 하고는 아무 설정도 바꾸지 말라고 단언하겠지.


    어느 날 방에 들어왔더니 내 책상 의자에 앉아 있는 M을 상상한다. 그새 나보다 훨씬 나이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M은 왜 네가 나를 그렇게 설정했는지 이제 알겠네, 하고는 하하 웃는다. 스포일러는 하지 않을게. M이 말한다. 그러는 M의 자태가 이미 스포일러라서 나는 조금 안심하고 말 것이다.



*다운로드 가능한 추가 컨텐츠

**심마다 ‘야망’을 설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베스트셀러 작가‘, ’만인의 친구‘ 등. E의 야망은 ‘명문가’였다.

***심즈의 유명한 치트키. 돈이 잔뜩 입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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