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검붉고 새파란' 잡지인가?
존 레논 가라사대 ‘No one, I think, is in my tree. I mean, it must be high or low. That is, you can’t, you know, tune in but it's all right. That is, I think it’s not too bad.’
이것은 내 인생에 있어 중요한 가사인데 어떻게 번역해도 특유의 정서를 살리기 어려워 아쉽다. 비유를 걷어내고 퍼석하게 설명하자면 결국 ‘나를 아무도 이해 못하는데 그래도 괜찮다’는 뜻이다. 나의 머릿속 나무에 아무도, 심지어 나조차도 도달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빠져 있던 중학생 이현서는 이 구절을 듣고 눈물을 쪼록쪼록 흘렸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대학교 신입생 이현서는 그 기억을 가지고 첫 영화를 만들었다.
다큐멘터리 <딸기와 나>는 감독이(=내가) 여태껏 찍은 딸기 디저트 푸티지를 사진첩에서 여럿 끄집어내며 시작한다. 나는 딸기를 몹시도 좋아한다는 고백과 함께.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딸기 향도 맡지 못했다는 tmi도 전하며. 과일에 대한 호불호 이야기로 무슨 다큐멘터리를 전개한다는 것인가? 피드백을 남긴 이들은 대개 초반부에 나를 의심했다고 털어놓았다.
오프닝에 이어지는 장면은 엄마의 인터뷰다. 엄마는 어릴 적 자주 아팠던 내가 딸기향 물약을 하도 많이 먹어 딸기를 싫어한 것 같다고, 그러던 애가 어느 날 딸기를 먹어보겠다 도전하고는 괜찮다 하더라고 진술한다. 엄마의 인터뷰까지 관객의 궁금증을 유도하고 촘촘한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를 푸는 게 원래의 계획이었다. 나는 중간에 계획을 엎고 즉석으로 나 자신을 인터뷰했다. 스스로를 인터뷰하는 게 과연 어떨지 의구심도 들었으나 나는 이내 촬영 도중 울컥도 했다.
당신이 비틀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앞선 가사가 'Strawberry Fields Forever'의 일부라는 걸 알고 연관성을 짚어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과일 취향이 바뀌기 전에 음악 취향부터 바뀌었다. 학교와 사회에 맞추어 나를 조각하던 십대 중반에. 숨이 나날로 옅어지던 그 작은 애가 락을 듣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돌풍을 만든 날개짓이었다.
나의 나무에는 아무도 없어요. 너무 높거나 너무 낮은가봐요. 그러니까, 당신은 귀 기울일 수 없다는 건데, 나는 괜찮아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어린 나는 이 대목을 듣고 눈물을 끅끅 쏟아냈다. 왜 그랬을까. 이유도 모르고 울었다. 내가 보편적인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것도 그게 나를 짓누르는 것도 진지하게 예술을 하고싶은 것도 몰랐다. 무엇보다 나는 예민하고 별난 나 자신을 미워하면서 내가 그러고 있는 줄을 몰랐다.
그때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제목에 딸기가 들어가는 그 노래의 그 가사를 들으면서부터,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나의 나무를 제대로 탐구했다.... 인터뷰에서 나는 천천히 이런 이야기들을 한다. 일기장 촬영본들이 이어진다. 어차피 아무도 접근할 수 없어, 하면서 방치해두었던 나무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제 인생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어요. 예를 들면 홈스쿨링. 나는 그때 나름의 대찬 결심을 하고 고등학교 자퇴 사실을 밝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귀엽다 - 크하하.
나의 나무는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와 달리 빨간 줄기와 보라색 잎을 가졌다. 그 요상한 나무에 물을 주기 시작하면서 나는 딸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 시작한 변화는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나만의 방식으로 부딪히며 나를 찾아갔다. 그렇게 꿈도 찾았다. 내게 이 노래가 그랬듯이, 나는 누군가의 용기를 깨우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지금 나는 시작점에 서 있다. 앞으로 나의 나무가 맺을 검붉고 새파란 열매를 기대한다.
영화는 이렇게 끝난다. 검붉고 새파랗다는 표현은 이때 처음 썼다. 대본을 쓰지 않고 마지막 내레이션을 녹음할 때 즉석으로 한 말인데, 내 머릿속 나무에 열리는 열매는 정말로 그런 색채일 것 같아 늘 마음에 남았다. 내게 참으로 중요한 이 책의 제목은 그래서 <검붉고 새파란 잡지>로 지었다.
<딸기와 나>는 물약 때문에 딸기를 싫어했다던 사람이 가벼운 얘기를 하는 척 하다가 반전으로 자신의 "보편적이지 않은" 면을 한 움큼 꺼내는 다큐멘터리다. 만 스물에 첫 과제로 만든 작품과 지금의 나는 물론 시차가 있다. 내 머릿속은 그때 파악한 것과 달리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빽빽한 열대우림이어서 아직도 탐험할 부분이 한참 남았다. 나는 길을 잃기도 넘어지기도 하며 검붉고 새파란 정글을 누빈다. 하지만 나는 타고나길 모험을 좋아하기에, 그 헤맴이 매번 감미롭다.
어린 나를 만날 수만 있다면 너는 요상한 너의 머릿속을 사랑하게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를 들으며 쪼그려 울던 이현서는 지금의 나를 보고 앞니를 다 드러내며 미소 짓겠지. 눈동자는 똑같은 얼굴로.
https://youtu.be/yibwEeaiEzQ?si=amZmaJ9cSSHeuH6p
<딸기와 나>는 이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후의 작업은 영화제에 출품하느라 유튜브에 올리지 않는데, 어쩐지 가장 미숙했던 시절의 이 다큐멘터리에 마음이 많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