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현서 May 24. 2024

에세이 <정말로 없는 애>

이혼가정 딸랑구의 학창시절과 현재

    중학교 3학년에 나는 과학 동아리의 일원이었다. 동아리 구성원은 대개 나의 좋은 친구였다. 그 외에 잘 모르는 애들도 몇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그 나이 애들이 그렇듯 곧잘 어울렸고, 담당 선생님의 지도 아래 적당한 실험을 하며 낄낄거렸다. 가을에는 학교 축제를 했다. 우리도 부스 하나를 차지했다. 과학 동아리다운 활동을 여럿 준비했는데 그런 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는 건 거짓말 탐지기다. 거짓말하면 손에 지직 전기 오르는 그거. 과학 동아리와 그게 무슨 상관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호객용으로 마련했던 것 같다. 우리는 돌아가며 예 혹은 아니요로 대답할 질문 리스트를 채웠다. 나는 사실 짝을 좋아한다. 나는 사실 담임 욕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사실 짝사랑을 하는 중이다. 나는 사실 친한 애 뒷담화를 해봤다. 나는 사실-.

    나는 사실 애미 없다. 이거 어때?

    나와 친하지 않은 애들 중 하나가 낸 아이디어였다. 그게 무슨 저급한 소리지? 그렇게 말해버릴 걸 나중에 커서 후회했다. 그 대신 나는 표정 관리를 하고 말을 골랐다. 계산을 돌려서 어투에 장난기를 씌웠다.

    정말로 없는 애가 있으면 어떡해.

    아하하. 그러게. 몇몇이 내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여자애의 아이디어는 질문 목록에 반영되지 않았다. 진짜 없는 애가 있을 수도 있겠네. 그렇게 의견이 모아졌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면 어떡해.

    참고로 내가 “정말로 없는 애”였다. “애미”는 있지만 “애비”가.

    그 나이 애들은 한없이 잔인할 수 있다.

    나는 화가 나는 순간에도 화를 낼 수 없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내가 이혼 가정 자녀라는 정보를 나름 성공적으로 숨겼다. 관련 얘기가 나올 때는 희미하게 대화 주제를 돌리거나 빠져나갔다. 명백한 거짓말은 딱 한 가지가 기억난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다같이 둘러 모여 자기 아버지 직업을 이야기하는 평범하고도 기괴한 쉬는시간이었고, 그때 나는 그 사람이 외국에서 일한다고 말했다. 난 어릴 적 유학을 한 적도 있기에 적절한 변명이었다. 나와 친했던 한 아이가 곧바로 대답했다. 집에도 초대했던 애였다.

    너희 아버지가 어디에도 안 보이길래 이상하다 했어. 근데 어쩐지. 외국에서 일하시는구나.

    에이 현서가 무슨! 그럴 리가 없지. 나는 그 친했던 애를 괜히 집으로 초대해서 별소리를 다 듣네, 하며 심란했다. 하지만 들킬 위험은 적었다. 나는 정말로 없는 애였지만 동시에 그럴 리가 없는 애였다.

    공부나 외모 걱정 등이 없었다는 뜻이다. 친구는 조금이었지만, 내가 공부를 잘하고 선생님들이 나를 예뻐하는 이상 소위 “잘나가는 무리”가 아니거나 친구가 적은 건 괜찮았다. 학교에는 이런 저열한 평가 기준을 바탕으로 뚜렷한 서열이 있고, 모두들 이혼 가정 자녀는 먹이사슬에서 밑바닥을 칠 거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내가 굳이 가면을 쓰지 않아도 대부분이 나를 이혼 가정 자녀로 보지 않았다.

    이혼 가정 자녀가 모두 불행하고 처절할 거라는 편견은 학창시절 나의 방어막이 되기도 했지만 내 가족을 "숨길 것"으로 만드는 족쇄였고 결국은 나의 주적이다. 그 편견은 내가 더이상 어떤 것도 숨기지 않고 나 자신을 계속해서 온라인에 노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런 스테레오타입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당신은 나에게서 어떤 이미지를 읽는지 궁금하다.


    한국 사회는 공기가 사납다. 이런 공격적인 주장은 앞서 잠시 언급한 유학 경험 덕에 가능하다. 내가 어릴 적 다닌 곳은 태국 방콕의 국제학교였다. 우리 학년은 국적이 무척 다양했다. 교장 선생님도 담임 선생님도 자신이 싱글맘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너무도 멋진 사람들이어서 자연히 멋지다고 생각한 게 돌이켜보면 내 뿌리에 주는 영양제였다. 매일 참 이상적으로 수평적인 수업에 참여했다. 누군가가 불쾌감을 느끼면 그걸 건강하게 표출할 수 있었다. 같은 반 애가 안전하게 커밍아웃했다는 소식은 나중에 들었다. 한발자국 나간 세상에서 나의 가정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안다. 태국은 결코 유토피아가 아니다. 내가 다녔던 국제학교가 그 시기에 유독 좋았던 것도 내가 추억을 더욱 미화했을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무더운 방콕의 기억을 고농축 비타민마냥 까먹으며 한국의 제도권 교육 속에서도 나 자신을 유지했다. 무난하게 버틸 때가 많았지만 때로는 원래의 나 자신이 고개를 홱홱 쳐들었고 결국 내가 지금 하는 작업들도 고개를 쳐드는 행위와 같지 않나 싶다.


    이건 “정말로 없는 애”가 한국 제도권 교육에서 내내 부정당한 경험을 토로하는 글이며 동시에 그런 부정 속에서도 스스로를 고집스럽게 지킨 이야기다. 나는 여전히 “정말로 없는 애”들을 끊임없이 대상화하는 사회에 발을 딛고 있지만, 그냥 나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남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들과 내가 얼마나 다른지 매순간 증명한다.

이전 03화 책이야기 <해골이 뒹구는 세상에서 시인으로 살아남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