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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우 Sep 22. 2023

유소년기 언어습득의 일고찰: ㅠㅠㅛㅛ의 시론을 위하여

나를 ㅠㅠㅛㅛ하게 하는 것들  - 어린 것들


§1. 서론

  “이미 나는 말할 줄 모르는 갓난이가 아니라 말하는 어린이[…] 어른들이 내게 말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하느님이여, 당신이 내게 주신 정신을 가지고 내 스스로 한 것이었습니다. 마음속 뜻을 나타내려 꿍얼거리고 온갖 소리를 내며 별의별 짓을 다 해보는 때였습니다. 생각을 다 표현할 수도, 맘먹는 사람에게 모조리 표현할 수도 없을 때였습니다.” 1) 


§2. 본론

  “땡깡”을 안 그치면 두고 가겠다는 말에 나는 울었다. 이미 울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들은 후에는 더 서럽게 울었다.

  대여섯 살 무렵의 일인 듯하나 자신하지 못한다. 그보다 더 어릴 때의 일이거나 더 나이를 먹은 후의 일일 수도 있다. 어디에서, 어떤 상황으로 인해 벌어진 일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 말을 들었던 찰나의 감정뿐이다.

  무서워서 운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언제나 진심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 사람이 말하는 것이 언제나 진심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는 채 십 년을 채우지 못한 삶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나이였지만, 고작 이런 일로 유기당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헤아릴 정도로는 해묵어 있었다.

  더 격렬해진 울음이 나를 덮친 까닭은 심중에서 샘솟은 어떤 비애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의 나는 비애라는 낱말을 알기에 어렸다. 그 감정을 비애라 지칭해도 좋을지 확신이 없기도 해서, 이때의 나는 주춤거린다. 그래도 여태 마땅한 다른 표현을 찾지 못한 나는 이대로 글을 잇기로 한다.

  오랜만에 당시 내가 느꼈던 비애의 기억을 길어 올려 그것의 생김새를 세세히 살핀다. 시간의 더께가 진득진득 달라붙어 있기에 조금은 힘에 겨운 작업이다. 부정형의 억울함과 서글픔과 무력함이 가냘픈 체념으로 묶인 채 엉겨 있다.

  나는 이 비애를 분절함으로써 그것이 어떠한 감정인지를 설명하려 애쓰고 있다. 실패하고 말 뿐인 시도이다. 내가 자의적으로 구획한 모든 부분들이 너무나 깊게, 너무나 단단하게 섞여 있는 까닭이다. 갖가지 색의 감정들은 용융된 뒤 한 덩어리로 굳어 각각의 빛을 잃었다. 어린 나의 비애는 오묘하게 검을 뿐이다.

  지금도 이 칠흑 같은 덩어리를 정확히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는데 어린이였던 내가 그것을 알 리 없었다. 하물며 내가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그 감정은 어떻게 탄생하고 말았는지를 부모에게 말로써 전달하기란 더더욱 불가능했다.

  이제야 겨우 쓸 수 있는 바조차 이 정도일 따름이다. 부모에게는 차와 집이 있지만 내게는 차도 집도 없었다. 내 처지에 타인으로부터 두고 가겠다는 협박을 당할 수는 있어도 같은 방식으로 타인을 협박할 수 없었고, 나는 그 기울어진 비참이 분하고 서러웠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후 나의 묘한 비애는 시시로 돌아왔다. 나를 괴롭히던 아이가 있는 유치원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인 일요일 저녁, 초침 끝에 그 비애가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소리를 지르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아느냐고, 엄마가 물은 적도 있었다.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으면 될 것이 아니냐는 반문은 그 비애와 함께 삼켜야 했다. 또 초등학교 방학식을 하고 사물함에서 꺼내온 교과서들이 무거워 걷지도 못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뒤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던 중학생이 빨리 좀 가라고 재촉하자, 내 짐은 그 비애가 얹혀 더 무거워졌다.

  나의 비애에 관해 친구들과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또래에 비해 조숙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말할 수 없기에 말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비애가 찾아올 때면, 어린 나는 비밀리에 슬펐다.

  하루는 낮잠을 자라는 말을 들었다. 잠이 오지 않는데 눈을 감고 누워 있어야 했다. 뒤척이던 끝에 눈을 떠보니 가족들이 모두 잠든 채였다. 살구맛 새콤달콤 같은 노을이 이울고 있었다. 나는 홀로 베란다로 나가, 길게 두어 번 소리를 질렀다. 왜 소리를 질렀냐는 물음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3. 결론

  幼. 어릴 유. 어리다는 의미의 한자로, 그 음은 유다. 어리거나, 미숙하거나, 작다는 뜻이다. 또한 幼는 그윽할 요 자이기도 하다. 그윽하거나, 깊거나, 오묘하거나, 아름답다는 뜻일 때는 유가 아니라 요로 읽는다.

  어린이로서 내가 겪었던 유소년기의 비애는 작다면 작은 것이었다. 그것이 무언지 한 발짝 떨어져서 들여다볼 여유는 없었다. 그러기엔 내가 과히 미숙했다. 이와 동시에 그것은 어찌나 묘하고도 심원한지, 계속해서 그 안에 머물고만 싶은 감정이기도 했다. 비록 요요擾擾하지만* 그 가운데 요요夭夭함*과 요요姚姚함*이 있는데, 워낙 요요遙遙했던* 그 요요함들로 인해 나는 그만 요요寥寥해졌다*. 그야말로 幼幼한 감정이었다.

  이 幼幼한 비애가 찾아오면 나는 ㅠㅠ 울고 싶은 기분으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비애는 광택이 있어 내 모습을 뒤집어 비췄다. 그것이 보여주는 내 얼굴은 ㅛㅛ였다. 나와 나의 비애는 그렇게 속으로 ㅠㅠㅛㅛ 울었다.

  시간은 유유히 흘렀다. 어린이에게도 짊어져야 하는 나름의 비애가 있다는 것, 그 비애는 유유幽幽하여* 어른의 비애보다 결코 얕지 않다는 것을 전할 방법을 찾다 보니 어느덧 나는 자랐다.

  아직은 그 비애를 지칭하기에 적합한 낱말을 찾지 못했다. 영어, 서어, 독어, 불어, 노어, 심지어 히브리어까지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적확하다 여겨지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마저, 그 幼幼한 감정을 비애라고밖에 부르지 못하는 일이 내게는 적이 섭섭하고 허하게 느껴진다. 직전에 놓인 문장에서 幼를 어떤 음으로 읽어야 할지조차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스무 살 언저리에는 쿤데라와 나보코프를 읽었다. 그들로부터 나는 체코어 단어와 노어 단어를 하나씩 배웠다. 쿤데라에 따르면 리토스트lítost란 “불현듯 발견한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보는데서 생겨나는 고통스러운 상태”2)이다. 한편 나보코프는 토스카тоска를 일러 “대개 특정한 원인이 없는, 막대한 영적 비통함의 감각 […] 갈망할 대상이 부재한 갈망”3)이라고 썼다. 쿤데라는 리토스트가 외국어로 옮기기 지극히 어려운 낱말이라고 말하고, 나보코프는 토스카에 관해 같은 논조의 이야기를 한다.

  다만 문제는 다른 언어로의 번역 가능성이 아니다. 간혹 나는 체코의 어린이들과 러시아의 어린이들을 상상한다. 그들을 진솔하고 진지하게 대한다면 아마 그들도 진솔하고 진지한 대답을 해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묻는다. 어른들에게는 말할 수 없었던, 멀고 깊은 슬픔을 느꼈던 적이 있지 않냐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되묻는다. 혹시 그 감정을 리토스트나 토스카라고 부르겠냐고.

  내 상상 속의 어린이들은 잠시 생각한다. 리토스트나 토스카에 해당하는 감정도 분명 있었지만, 그런 어른의 말로 개개의 어린이가 경험하는 모든 비애를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재차 캐묻는다. 리토스트도 토스카도 아니라면 그 감정을 말할 다른 낱말을 아냐고.

  어린이들은 아무도 그 말을 알지 못하기에 그대로 ㅠㅠ 울음을 터뜨린다. 어린이가 우는 모습에 나도 ㅛㅛ 울고 만다. 그렇게 같이 ㅠㅠㅛㅛ 울다가, 몰려오는 주변 어른들의 눈치를 살핀다. 구태여 누군가 울리지 않더라도 오직 자신으로 말미암아 울 수 있는 내면의 깊이가 어린이들에게도 있음을 어떤 어른들은 헤아리지 못한다. 고로 나는 슬퍼하며 도망친다──유유히, ㅠ.


§4. 참조

*요요擾擾하다: 뒤숭숭하고 어수선하다. [표준국어대사전]

*요요夭夭하다: 3. 어떤 물건이 가냘프고 아름답다. [표준국어대사전]

*요요姚姚하다: 아주 어여쁘고 아리땁다. [표준국어대사전]

*요요遙遙하다: 매우 멀고 아득하다. [표준국어대사전]

*요요寥寥하다: 1. 고요하고 쓸쓸하다. [표준국어대사전]

*유유幽幽하다: 깊고 그윽하다. [표준국어대사전]


1) 아우구스티누스, 최민순 역, 『고백록』, 바오로딸, 2016, pp. 46-47.

2) 밀란 쿤데라, 백선희 역, 『웃음과 망각의 책』, 민음사, 2011, p. 230.

3) Alexander Pushkin, Trans. Vladimir Nabokov, Eugene Onegin: A Novel in Verse, vol. 2., Bollingen Foundation, 1964, p. 141.



작가의 말

  때로는 한국어가 갑갑했다. 뜻하는 바를 적확히 나타낼 표현을 그 안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국어가 아닌 여러 언어를 배운 뒤 이 갑갑함은 말로써 온전히 해갈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인간의 내면은 인간의 언어보다 幼幼해서, 종국에는 말문이 트이지 아니한 어린아이처럼 침묵을 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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