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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우 Sep 22. 2023

선견자 T

나를 ㅠㅠㅛㅛ하게 하는 것들 - 우는 것들

      

Cover image by A.Savin - Own work, FAL,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8931000


  T가 울기 시작한 것은 M7, 일명 볼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스크바발 블라지미르행 버스에서의 일이었다. 모스크바-블라지미르 구간의 M7은 약 700년 전 티무르의 침공을 피해 블라지미르의 성모 이콘1)이 모스크바로 옮겨질 때 밟았던 경로와 거의 일치했다. 우리는 동로마에서 키예프로, 키예프에서 블라지미르로 전해졌던 성모 이콘이 마침내 모스크바로 향할 때 지났던 길을 반대 방향에서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버스를 타기 전 나는 앞유리 안쪽 높이 매달려 햇빛을 반사하던 성 니콜라이의 이콘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때 내게 다가온 사내는 다른 윗옷은 없이 가슴팍이 망사로 된 허름한 조끼만을 입고 있었다. 그늘에서 걸어나온 사내의 가슴털이 여름의 빛 속에 투명했다. 『백치』의 어느 등장인물도 맨살에 조끼만 걸친 채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것이 여름철의 흔한 차림이라고 썼던 듯했다. 그 등장인물이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무엇을 찍지?

  ──니콜라이.

  ──차마다 있는 걸?

  싯누런 이가 몇 군데 빠진 사내는 머리카락이 세었고 얼굴에 주름살이 깊었다. 바깥일에 단련되고 또 마모된 흔적이 역력한 사내의 육체로부터 그의 나이를 읽어내기란 어려웠다. 더운 볕으로 발갛게 익은 그의 팔뚝에 이두근이 불거져 있었다. 

  ──그건 러시아의 일이고. 자동차에서 성 니콜라이 이콘을 못 봐요, 한국에서는.

  ──난 우즈베크인이야. 담배 있나?

  우즈베크 사내는 재빨리 담배를 피운 뒤 먼저 버스에 올라 후미 부근에 앉았다.

  그날 T가 버스에서 울었다는 것은 나중에 I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 일행은 나를 포함해 세 명이었다. 나는 I 옆에 앉았다. T의 좌석은 나와 I에게서 떨어진 뒤쪽 자리였다. 앞쪽 창가에 앉은 나는 T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공사 중인 볼가 고속도로는 차량으로 꽉꽉 들어찼고, 200km도 되지 않는 거리에 좋이 네 시간을 소요하는 버스의 열리지 않는 창문 밖으로 권태로운 풍경만이 유장히 기어갔다.

  시야의 전면에서 달랑대는 성 니콜라이 이콘의 뒷면을 보며 나는 자다 깨길 거듭했다. 꿈을 꾼 것 같았으나, 덜컹댈 뿐 고저 없이 따분한 러시아의 길 위에서 자는 잠만이 노곤하고 녹진할 따름이었다. 꿈이 끝나는 곳과 다시 시작되는 곳을 가늠할 수 없었기에 나는 꿈의 내용을 헤아려 떠올릴 수 없었다. 이콘의 앞면에 인쇄된, 버스 안에서 볼 수 없었던 성 니콜라이의 생김새가 아스라이 잊혔다. 현실의 감각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갔다. 피로한 여로는 가도 가도 몽롱한 노국露國이었다.

  몽유하는 발이 이끄는 대로 버스에서 내리니, 나와 말을 섞었던 우즈베크 사내는 어딘가로 증발해버린 블라지미르였다. 해는 기운 지 벌써 오래여서 사양에 젖은 도시가 졸고 있었다. 다소 멍청한 안색이었다. 나는 블라지미르에 내리고도 한동안, 전에 와본 적 없는 도시에 어째서 내가 T와 I를 동반해 있는 것인지를 상기하지 못했다. 입가의 침을 닦았다. 나 또한 멍청한 얼굴을 내비쳤을 터였다.

  모스크바의 호스텔에서 깨어난 아침, 나와 T와 I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얼마 뒤 당일치기로 블라지미르에 다녀올 것을 제안한 이는 나였다. 셋 중 홀로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이도 나였다. 블라지미르 소재 성모영면 대성당에는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작업한 프레스코 이콘이 있었다. 시간이 맞는 기차가 없었고, 우리는 중앙버스터미널로 갔다.

  오는 길이 막혀서, 돌아가는 차에 타기 전 블라지미르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성모영면 대성당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더욱 짧았다. 급히 내달렸다. 숨을 고르며 대성당에 들어섰다.

  대개 러시아 정교 성당의 이콘들은 그들 앞에서 끝없이 불타는 초와 향으로 인해 본래의 색을 잃게 되므로 수년마다 새 안료가 입혀진다. 그러하여 대성당의 내벽은 혼란스러웠다. 프레스코 이콘들은 세월 속에 퇴색된 것들이 최근에 새로 손댄 것들과 뒤섞여 벽면을 뒤덮고 있었다. 그들의 배경이 되는 벽의 색마저 어떤 곳은 파리하여 잿빛에 가까운 파랑이었고, 다른 곳은 칠한 지 얼마 안 되어 두 눈을 찌르는 청록이었다. 블라지미르의 성모영면 대성당 안에서 정확히 어디에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손길이 닿았을지, 그의 손길이 거기에 얼마나 남아 있을지 분간할 재간은 내게 있지 않았다.

  숱한 형상들이 문신처럼 얼룩덜룩 새겨진 성모영면 대성당의 내면은 불가해한 것이었다. 대성당으로부터 나온 그 순간 이래 나는 내가 본 것들을 잊었다. 명확히 기억나는 단일한 이콘은 단 한 점도 없었다. 파르께한 형상들의 인상만이 남았기에 블라지미르의 성모 이콘을 따라 모스크바로 달릴 때 M7은 더 혼곤해졌다. 돌아가는 버스에는 성 니콜라이의 이콘이 달려 있지 않았다.

  블라지미르의 성모 이콘은 복음사가 성 루카가 성모 생전에 그녀를 직접 보고 그린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다만 미술사학적으로 접근할 때 블라지미르의 성모는 비잔틴 양식의 이콘이지 서기 1세기의 것일 수 없다.

  블라지미르의 성모와는 모스크바의 트레치야코프 갤러리에서 대면했다. 본디 성모영면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었던 블라지미르의 성모 이콘은 이제 블라지미르가 아니라 모스크바에 있었고, 모스크바에서도 여전히 블라지미르의 성모라 불렸다. 나는 이 이콘을 성 루카가 그렸을 것 같기도 했고, 이름 모를 어느 비잔틴 성화공이 그렸을 것 같기도 했다.

  나이 모를 우즈베크인은 차마다 성 니콜라이의 이콘이 있지 않냐며 수사적으로 물었고, 나 역시 그것은 러시아의 일이라고 수사적으로 답했다. M7을 달리는 블라지미르발 모스크바행 버스에서는 성 니콜라이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참으로 우즈베크인을 만났던지, 그것이 꿈은 아니었을지 의심스러워졌다.

  T가 운 것은 내가 그녀를 볼 수 없었던 때, 그녀가 내게 보이지 않았던 곳에서의 일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체취가 역한 러시아인이 바짝 붙어 있었고, 그는 갑자기 걸어가겠다며 버스에서 내리게 해달라고 소란을 피웠다. 나아가지 못하고 서 있을 뿐인 버스 안에서 차장은 블라지미르에 도착할 때까지 정차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는 듯하다. 비명을 지르는 러시아인의 난동은 차장이 대꾸하지 않아도 계속되었다. 그때 T는 러시아까지 온 자신이 볼가 고속도로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T가 아니라 I가 전한 이야기였다.

  성 니콜라이의 이콘을 매달지 않은 버스에서 T는 내가 볼 수 있는 좌석에 앉았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하는 기색이었고, I는 피곤했던지 잠든 채였다. 나는 I를 깨워 노어를 하지 못하는 그가 I 옆에 앉았던 러시아인과 차장의 대화를 어찌 이해할 수 있었는지, T가 울었다는 것이 정말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I는 이제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성경에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εἰκὼν τοῦ Θεοῦ τοῦ ἀοράτου”(Κολ. 1,15)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형상’에 대응하는 희랍어 원문의 표현 “εἰκὼν”을 로마자로 전사하면 eikṓn, 즉 이콘이다. 성 이오안 다마스킨 등은 위 인용구로부터 파생되는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성상파괴론자들과 맞서며 이콘을 옹호했다. 그들에게 이콘이란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 되는 우상이 아니라 감각으로 포착 불가능한 실재가 눈에 보이도록 하는 통로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우리가 대성당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성모영면 대성당에는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이콘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우리는 모스크바를 떠나 블라지미르에 체류했다가 모스크바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일까.

  밤이 내린 블라지미르-모스크바 구간의 M7은 가로등이 드물었다. 자동차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은 온통 어둠이었다. 나는 차도의 경계 너머에도 러시아가 펼쳐져 있으리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을 따름이지 보이지 않는 것이 진실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러시아의 고속도로를 끝없이 달렸을 뿐, 어느 도시에서 승차하거나 하차한 적이 끝끝내 없었는지도 몰랐다.

  모스크바는 가까워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잠을 청하려 해도 졸음의 기척을 찾기가 어려웠다. 창밖에는 명료한 것이 없어 정신만이 선명했다. 이미 깊은 몽중의 일인 까닭에, 나의 눈먼 상상이 창밖의 풍경을 암흑으로 덧칠한 것일 수도 있었다. “우스운 사람의 꿈”이라는 어구가 뇌리를 스쳤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단편의 제목임이 분명하게 기억났다.

  러시아의 고속도로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눈물을 흘렸다는 T는, 보이지 않기에 사진으로도 남기지 못할 것의 존재를 나보다 빠르게 감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잠결의 일이었다고 한들 같은 버스에 타고 있었던 나는 어떤 소동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헤아려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지루한 풍경과 내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성 니콜라이 이콘의 율동뿐이었다. 어쩌면, 꿈을 꾼 이는 그날 무언가를 이해하고 울기 시작한 T였을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말

  이상한 일이다. 친견한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이콘 중에는 그 모습이 기억나는 것이 단 한 점도 없으니 말이다. 외려 마음에 입묵된 것처럼 떠오르는 형상은 노브고로드의 구세주변모 성당에서 마주친, 페오판 그렉의 성 마카리 이콘이다. 이 이콘은 현대에 들어 대대적인 보수를 한 적이 없는 까닭에 성 마카리의 얼굴이 지워진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얼굴이 지워진 페오판 그렉의 성 마카리는 꿈속에서 만나 인상만이 남아버린 사람 같다. 구체적인 상은 유실된다. 본디 페오판 그렉은 성 마카리를 어떤 얼굴로 그렸을까. 얼굴이 남아 있지 않아도, 여전히 이 이콘을 성 마카리 이콘이라 부를 수 있을까. 꿈결에 본 듯 불분명한 형상만이 심중에 온전히 수장되었다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파라오의 대신들이 꾼 꿈을 풀이하는 요셉의 이야기가 나온다. 불가타판을 인용하자면, 요셉은 해몽을 시작하기 전 그들에게 “non Dei est interpretatio?”(40,8)라고 되묻는다. 간혹 나는 이 구절을 ‘해석은 신적인 일이 아닌가?’로 새기고 싶어진다.


1) 주로 동방교회에서 발달한 예배용 화상, 명칭은 ‘상(像)’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이콘에서 유래한다. (『미술대사전(용어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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