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ㅠㅠㅛㅛ하게 하는 것들 - 보이지 않는 것들
시청 앞 횡단보도에 섰을 때 대한문 너머로 어스름한 노을이 남아 있거든 봄이었다. 회화나무 곁에 내려앉은 어둠 속 고양이가 어렴풋한 검은 그림자로만 보이거든 다시금 겨울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후 7시경 정동길을 걸으면, 계절은 그렇게 오고 갔다.
화요일 저녁이면 덕수궁 돌담을 따라 프란치스코교육회관까지 걸었다. 수업이 코로나로 인해 회관에서 열리지 않게 되기 전까지, 꼬박 1년간 매주 화요일 저녁은 정동길을 걷고 히브리어를 읽는 시간이었다.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한 때로부터 수년 전, 겨울이 끝나갈 무렵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두 달 만에 들어보는 S의 목소리였다. 연탄을 피운 뒤 응급실에서 깨어났을 때 처음 생각난 사람이 나라고 했다. 그 이전의 마지막 통화에서 그 사람은 내게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붙잡을 길 없는 말이었다.
이번에는 S가 나를 붙잡지 못할 차례였다. 나는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연애는 그것으로 온전히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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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와 처음 만난 장소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스카이박스였다. 축구 경기를 계기로 만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나를 급하게 배우로 뽑았던 프로젝트성 팀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진행되는 어느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할당된 공간은 문제의 스카이박스 한 칸이었다.
나를 비롯한 네 사람은 아리엘 도르프만의 『죽음과 소녀』를 번안하여 낭독극으로 상연했다. 돌이켜 보니 상연된 것은 엉망인 극이었으며, 그때 현장에서 느끼기에는 더 엉망인 극이었다(내 탓도 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담한 스카이박스를 채울 정도로는 회차마다 관객이 계속 있었다.
저녁 공연이었다. 무대공간은 예상보다 어두워서, 나는 희곡 대사를 일렁이는 촛불에 비춰 알아보느라 남몰래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한 관객이 친구를 데리고 조금 늦게 들어왔다. 뒤따르는 문장에는 어떠한 과장이나 비유가 전무하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S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누군가 실수로 천장 조명을 켠 줄 알았다. 무대는 객석보다 밝으므로 배우는 관객의 얼굴을 살피기 어려워야 정상이다. 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문이 닫힌 후에도 객석이 온통 환했다.
극이 끝나자마자, 의상을 갈아입지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 S는 친구와 함께 재떨이 곁에 서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제가 이런 걸 잘하는 사람이 아닌데요.”
S의 전화번호를 얻어 며칠 후 만나기로 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을 통해 만난 그녀와 마실 것으로 고른 와인은 칠레산 이슬라 네그라였다. 이슬라 네그라를 마시며 나는 두 번째 만난 그녀의 이름이 S라는 것, 카페 매니저로 일하고 있으며 커피에 관해 잘 안다는 것, 내 예상보다 어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는 2층에 있어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는 외부 계단으로 내려가야 했다. 2층 실내에서 술을 마시다가 1층 실외에서 키스를 하고 다시 2층 실내로 와서 곧장 사귀자는 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나 또한 어렸다. 거절의 답이 돌아왔다.
나는 1년 넘게 S를 따라다녔다. 그러는 동안 S는 S대로 다른 사람을 만났고 나도 나대로 다른 사람을 만났다. 당시 나는 연극 아닌 일로 나름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대기업에 재직 중이었던 어느 여자는 자신이 살아 보지 못한 20대를 그 위태로움 속에서 발견하려는 듯했다. 연후 사소한 사건 하나로 불현듯 그녀가 귀찮아져서 관계를 정리했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나에게 썩 진지하지 않기도 했고, 나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그녀는 걸어 들어오는 것만으로 객석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이슬라 네그라는 본디 지명이다. 칠레의 엘 키스코에 있으며, 네루다가 살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Tengo hambre de tu boca, de tu voz, de tu pelo네 입, 네 목소리, 네 머리카락에 나는 굶주려서/y por las calles voy sin nutrirme, callado,챙겨 먹지도, 입을 열지도 않고 거리들을 돌아다닌다/no me sostiene el pan, el alba me desquicia,난 빵으로 지탱이 안 돼, 새벽은 내 신경을 긁고,/busco el sonido líquido de tus pies en el día.낮에는 네가 걷는 유동성의 소리를 찾아다닌다.” 네루다의 소네트 11번 같은 시절을 보내며 나는 S와 드문드문 만났다. 한 번의 만남과 그다음 만남의 간격은 제법 길었다. 이번엔 제대로 차였다고 생각했던 날의 만남으로부터, 그녀가 혜화의 한 극장으로 찾아왔던 날의 만남에 이르기까지의 간격은 특히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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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혹은 버레쉬트בְּרֵאשִׁית의 22장에서 신은 아브라함을 부르고, 아브라함은 이렇게 응답한다. “히네니הִנֵּֽנִי.” “예, 여기 있습니다.”로 옮겨지는 말이나 직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저를 보소서.’ 그의 대답을 들은 신은 명령한다. 네가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쳐라. 과거 신은 아브라함에게 ‘지키다’라는 뜻의 גנן 어근에서 파생된 “마겐מָגֵן”이라는 단어로써 “나는 너의 방패다.”라고 말한 적 있다. 자신은 그를 지킬 방패라고, 그의 후손을 번성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신이 아브라함더러 늘그막에 얻은 유일한 적자 이사악을 죽이라 한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데리고 그를 제물로 바칠 곳으로 걸어간다. 이사악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아버지를 부른다. 아브라함은 응답한다. “히네니.” 나를 보아라. 나 여기 있다. 그리고 기어이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칼로 찌르려는 순간,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에 아브라함은 또 한 번 이렇게 답한다. “히네니.”
저를 보소서. 방패가 되어줄 것이라는, 후손이 번성하게 해줄 것이라는 약속을 듣고도 하나뿐인 적자를 죽이려 하는 저를 보소서. 곧 죽을 아들더러 아비를 바라보라 말하는 저를 보소서. 아들을 사랑하면서도 당신을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려 하는 저를 보소서. 당신을 도무지 알 수 없어 하는 저를 보소서. 부디, 당신도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은 저를 보소서. 저를, 여기 있는 저를 제발 보아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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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는 상연 시간보다 몇 시간 이르게 극장을 찾았다. 다시 S를 보게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놀랐다. 내가 또 연극을 한다는 소식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나는 체호프의 『바냐 삼촌』을 연출하고 있었고, 이번에도 번안극이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버려두고 극장을 나와 초밥으로 S와 점심을 먹었다. 하얀 밥알처럼 얌전한 식사였다.
극단의 인원은 적었다. 연출 외에 상연 중 조명과 음향의 조정도 내가 도맡았다. S가 객석에 앉아 있었던 회차에서 나는 두 차례나 조명 실수를 했다. 관객 중에는 아는 이가 없었을 것이고 배우들도 몰랐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실수가 있었음을 나는 알았다. 그 실수의 이유도 잘 알고 있었다.
상연이 끝나고 다음 회차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S도 긴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이거, 우리 얘기네요.”
그녀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극장을 떠났다.
사귄다는 것을 서로 사귀고 있음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독점적인 관계의 유지로 정의한다면, 이후 S와 사귀기는 했다. 몇 달 가지 못했다. 나도 불행하고 그녀도 불행했다. 외적인 요인들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나는 점거한 건물에서 몸싸움 끝에 바깥으로 패대기쳐지는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나와 S 모두 사귀는 상대를 보고 있지 않았던 일이었다.
조명을 동반한 듯한 형상으로 나타났던 S.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아주 멀어졌나 싶으면 어느새 도로 찾아오던 S. J라는 사람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던 S. 취미로 사진을 찍었으며, 나중에는 사진관에서 새 일자리를 구하고 자신의 사진을 찍던 S. 자신의 반향으로써 연출된 극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보러 오던 S. 항상 극적인 순간에 극적인 말을 남기던 S.
나는 그녀와 헤어진 뒤 『김현우와 김현우와 김현우와 김현우』라는 희곡을 쓰다 말았다. 희곡은 대략 이런 식이다. 극중 김현우①은 자신과 옛 애인을 모티프로 하는 연극을 연출한다. 그가 연출하는 극의 주인공은 김현우②이다. 김현우①의 분신인 김현우③이 무대 위에 나타나고, 현실은 김현우②가 등장하는 연극과 전혀 다르지 않았냐며 김현우①을 조롱한다. 이때 객석에 앉아 있는 실제 작가이자 연출가인 김현우④는, 다들 잘못된 연기를 하고 있는데 진짜 김현우는 나라고 외치며 무대로 난입해 난투극을 벌인다(이 희곡에는 김현우들 외에 한때 내 의식의 한구석을 점유하고 있던 인물들도 다수 등장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레닌과 마야코프스키를 향해 “꺼져, 대머리야!”라고 외치는 장면이 소용없게 되어버린 일이 약간은 아쉽다).
참으로 S는 나의 무대로 올리기에 완벽한 인물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이 연극의 한 장면 같았다. 하지만 나는 S가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어떤 사람일지 전혀 몰랐다. 그녀 편에서도 나는 프레임에 담기 적합한 피사체였다. 나는 무대 조명을 쏘이지 않고서는 S를 보려 하지 않았고, S는 파인더를 통하지 않고서는 나를 보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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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보아달라는 절규 끝에 아브라함은 답을 듣는다.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이 문장의 히브리어 원문에서 활용된 것은 ‘알다’라는 뜻의 야다יָדַע 동사이다. 스트롱의 히브리어 사전에 따르면 ‘야다’란 그냥 아는 일이 아니라 제대로 아는 일, 봄으로써 알게 되는 일이다. 신은 아브라함을 보아주었고, 그러함으로써 그를 제대로 알아주었다. 연후 그는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에게도 나타난 자신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재확인한다. “히네” 보라. “우셔마르티카 וּשְׁמַרְתִּ֙יךָ֙” 너를 지켜 주겠다. “우셔마르티카”에서 사용된 샤마르שָׁמַר 동사에도 ‘보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바, 이는 궁극적으로 ‘주시하다’, ‘지키다’라는 뜻을 지니게 된다.
보는 일과 지키는 일이 하나라는 것을 히브리어를 배우기 전 나는 알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이사야서에서, 아브라함의 방패인 신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벗אֹהֲבִֽי 아브라함”. “나의 벗”이라 번역되었지만 “오하비אֹהֲבִֽי”에는 사랑을 뜻하는 אהב 어근이 있다. 고로 이 말을 ‘나의 사랑하는 아브라함’이라고 새겨도 좋을 법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보고 지키는 일, 지켜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히브리어를 읽기 전 나는 알지 못했다.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보아야만 사랑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나도 S도 몰랐다. 희곡을 탈고하지 못한 까닭은 여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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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시도로부터 몇 년이 흐른 시점에, S는 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알고 보니 그녀가 취직한 사진관은 내 집에서 걸어갈 거리에 위치한 상가에 있었다. 사귀는 동안 나는 그녀의 집에 딱 한 번 가보았고 그녀는 내가 정확히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녀와 헤어진 뒤 나는 이사를 했다. 고로 나는, 의도적으로 내가 사는 곳 근처에서 취업을 한 것은 아니라는 그녀의 말을 지금도 믿는다. 다만 S가 내 인생에 불쑥 재등장을 시도한 방식은, 여전히 S다웠다.
S를 볼 일이 없었던 시간을 거쳐 나는 히브리어 실력이 얼마간 늘어 있었다. 예컨대 나는 ‘니르아נִרְאָֽה’라는 낱말을 분석할 수 있게 된 후였다. ‘니르아’는 주로 신이 현현하는 대목의 문장에서 술어로 쓰이는데, 한동안 나는 이를 ‘나타났다’라는 뜻의 표현으로만 알았다.
실상 ‘니르아’는 라아רָאָה 동사의 니팔 형태이다. 니팔은 수동 또는 재귀의 의미로 쓰이고, ‘라아’ 또한 ‘보다’를 뜻하는 단어이다. 즉, 히브리어에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신의 나타남이란 자신이 보는 이의 객체가 되는 일을 감수하는 것, 구태여 자신을 보이도록 하는 일을 무릅쓰는 것이 된다.
자신을 보임으로써 현현하는 신을 아브라함은 보고 알고 사랑한다. 자신을 보아달라 청함으로써 신 앞에 존재자로 나서는 아브라함을 신은 보고 알고 사랑한다. 서로 바라보는 가운데 존재자는 지켜지며 보이게 됨으로써 사랑하고 사랑받는다. 그 자신도 사랑의 사랑을 받는 사랑이 된다.
S는 자신이 일하는 사진관에 들르라고 했다. 나는 더 답하지 않았다. 이미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과 만나던 중이기도 했지만, 내게 애인이 없었더라도 S를 만나기 위해 사진관으로 걷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를 알아볼 때까지 지켜볼 의사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과거의 S가 나를 그리 대했을 리 없다. 일산화탄소를 들이마신 뒤 정신을 차리고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를 볼 의사가 없는 그녀에게 나 자신을 보일 의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갑자기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들어선 사진관에 우연처럼 S가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돌아서서 나갈 필요까지는 없겠지. 담담하게 인사를 나누고, 카메라 렌즈 앞에 자리를 잡아야겠지. 그녀는 사진 몇 장을 찍다가 파인더에서 눈을 떼고, 우리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이 오고 말겠지. 그러면 나는, 대뜸 이렇게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말겠지──
──그래도, 이제는 혹시,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느냐고.
찰칵.
역시, 아직은 답이 보이지 않는 질문이다.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당신은 더 어둡길 바라지You Want It Darker」라는 노래가 있다. 코헨כֹּהֵן은 히브리어로 사제라는 뜻인데, 이름에서 드러나듯 그는 유대인이다. 그리고 「당신은 더 어둡길 바라지」는 그가 사망하기 불과 19일 전 발표되었다.
“A million candles burning결코 오지 않은 도움을 위해/For the help that never came타고 있던 백만 개의 촛불들/You want it darker당신은 더 어둡길 바라지/Hineni, hineni히네니, 히네니/I'm ready, my Lord나의 주시여, 난 준비가 되었소”. 미지의 어둠 속에 있는 절대자, 혹은 연인을 상대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현존을 선포하는 그의 가사에는 현현玄玄한 호렙의 아름다움이 있다. 현현顯現은 오직 현현玄玄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