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에 대한 탐미

느끼기 #2

by 현예

한국에 카페 문화가 처음 시작하는 시점이었던 것 같다. 커피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휴가 나온 군인이었던 나에게 무엇을 주문해야 하는가는 군 생활만큼이나 깝깝하고 답답한 문제였다. 결국 가장 기본적인 걸 고르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어디선가 주워들은 에스프레소라는 단어를 떠 올리며 당차게 주문했다. 옆에 있던 동생이 썩은 표정으로 무슨 에스프레소를 먹냐며 아메리카노나 먹으라고 핀잔을 주었다. 스타벅스에서 알바를 하고 있던 동생에게 에스프레소 주문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게 나와 커피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었다. 공식적이라기보다는, 뇌리에 깊게 남아있는 마음속의 민망한 상처 같기도 하다. 그 이후로 에스프레소 주문을 못해봤다.


그 이후로 커피는 줄곧 나에게 탐구해 보고 싶은, 또는 공부해 보고 싶은 어려운 존재였다. 아직은 쓴맛에 익숙하지 않았던 어린 나이였기에, 맛의 차이를 알기에는 대충, 빨리, 많이 먹던 시기였기에 사실은 알래야 알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커피라는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 있었다. 사실은 편견으로 가득 찬 집착이었다. 예전부터 이런 편견에 온 마음을 담아 가득 저항하기도 하면서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록 음악을 좋아하며 음악을 듣기 시작했을 때, 정말 음악을 좋아하게 되면 재즈나 클래식으로 결국은 가게 된다는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의 이야기에 격렬히 반응하며 나는 끝까지 록 음악을 고집하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음식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평양냉면으로, 술을 아는 사람으로 와인으로 향한다는 이야기와도 비슷한 결이다. 저 세계로 진입하면 내가 정말 다른 수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겠다는 기대와 한편에는, 그저 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커피에서는 그러한 단계가 ‘산미’였다. 커피는 산미가 있어야 커피라는 전문가들의 이야기는 나에게는 엄청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난 맛을 모르는 건가’라는 좌절감을 주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내리는 일은 이제는 나에게 정해진 루틴이 되었다. 고백하자면 다시 커피를 내려 마신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출근길에 저렴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집을 찾아 하나씩 들고 가는 게 전부였었다. 하지만 얼마 전 간단한 수술을 하고 지난 시절 신경 쓰지 않고 아무것이나 대충 먹었던 식습관과 불어난 체중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된 후 조금은 더 깨끗한, 건강한 음식을 먹기 위해 노력하고 술을 마시지 않기 시작하며 미각도 리셋되었다. 처음 커피를 직접 내려서 마셔보려고 시도했던 10년 전에는 소위 말하는 고소한 커피가 좋았다. 큰 맛의 차이를 못 느끼면서 ‘저는 인도네시아 만델링 같은 흙맛의 커피가 좋더라고요’라고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나도 ‘산미’를 느끼고 추구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산미’를 느낄 때 내가 현재 추구할 수 있는 자극 중에 가장 건강한 쾌락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나만의 산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또는 이제는 내 취향에 대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정도의 나이가 되었을 수도 있다. 아침에 일어나 수동 그라인더에 커피를 분쇄하고, 내릴 준비를 하는 시간 동안 오늘 하루에 대해 그려보며, 맛있게 내려질 커피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방금 내린 커피의 따뜻함과, 예전엔 못 느꼈던 그 안의 다양한 맛은 이걸 왜 이제야 느낀 걸까라는 후회를 절로 불러온다. 이 한 잔의 즐거움에 대한 탐미는 그저 잠을 깨기 위해 마시던 이전의 커피와는 다른 차원이다. 이 시간 동안은 날 불안하게 하던 모든 것들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오히려 새롭게 잘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로 넘쳐나고, 내가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듬뿍 쏟아져 나온다. 앞으로도 당분간 커피와 산미에 대한 나의 탐미는 계속될 예정이다. 새로운 탐미의 존재가 또 나타날 수도 있다. 변하지 않는 건 이 소소한 즐거움이 날 불안으로부터 굳건하게 지켜줄 거라고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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