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나는 존나라는 말을 원래 싫어한다. 비속어쓰는 것도 정말 싫어한다. 하지만 오늘은 꼭 이렇게 표현해야 찰떡같이 이 상황을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속이 뒤집혔다.
모르는 아저씨와 한판 붙었기 때문.
내가 약 8개월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스터디룸 특성상 예약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급히 취소하면 위약금을 물게 된다(전체 금액의 50% 임). 우리는 만약의 컴플레인을 대비해 사전에 꼭 설명한다. 누가 이용도 못하는데 돈을 내고 싶어 하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매번 예약 때마다 위약금을 설명하고, 취소는 언제까지 무료로 가능한지 상냥하게 설명한다. 오늘 문제의 아저씨 예약 사항에는 누군가 며칠 전 예약을 받으며 위약금을 안내했다는 메모가 분명 적혀있었다.
아저씨는 일단 전화로 다짜고짜 일정이 취소되어서 오늘 예약을 취소해야겠다~며 말했다. 예약 50분 전에 취소하면서 그리 당당한 사람도 또 처음이다. 여기가 무슨 아저씨 계모임 하는 개인 공간이냐고요.
그러고 나서 발생되는 위약금에 대한 내 설명은...? 자꾸 말끝을 잘라먹으며 자신이 이용도 못하게 됐는데, 돈은 무슨 돈을 내냐며 있는 승질 없는 승질 모두 모아 나에게 선사했다.
알바 n회차, 진상 손님 n회차인 나 여기서 질 수는 없지. 위약금이 왜 생겼는지 요렇게도 설명해보고 저렇게도 설명해봤다. 이렇게 슬프게도 '을'의 입장도 여러 번 겪다 보면 웃으며 이 상황을 넘겨보고자 하는 해탈 정신을 발휘하게 된다.
심지어 아저씨는 전날 보낸 예약 카톡까지 읽었고 거기에도 분명 위약금 사항이 명시되어 있다. 그 카톡은 자기가 기억도 안 난다며 우겼지만. 아저씨가 계속 윽박지르길래 '지금 계속 우기시는데...'라고 내 본심을 담아 말했더니 '이 아가씨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라고 반발했다. 심지어 말끝마다 아가씨, 아가씨 기분 더러웠다. 전에도 꼭 이번 같은 경우가 있었더랬다. 처음부터 자기 잘못은 생각 못하고 일단은 만만하고 상냥하게 설명해주려는 아르바이트생한테 냅다 화부터 낸다. 진상 손님 가라사대, 이런 손님의 경우 그들의 목적은 하나이다. 어찌 됐건 본인의 잘못은 아주 사소하다고 생각되니 일단 사과부터 받고 오냐오냐 떠받들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말을 반박하거나, 논리에서 지거나 하면 아주 열 받아하고. 내가 조금이라도 화내는 꼴을 못 본다. 화를 내는 건 오직 본인들만 허용된다는 듯이.
암튼 그는 나와 통화를 하다가 갑자기 전화를 끊었다. 당황한 나는 바로 전화를 걸었고 아저씨는 또 전화를 한참 하다가 본인 논리가 막힌다 싶을 때 또 뚝-끊어버렸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아씌... 개열받네...'라고 저 단전에서부터 나온 진심의 말이 흘러나왔다.
+이때 홀에서 주문을 기다리거나 일행을 기다리던 손님 모두 내 눈치를 살피며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전화가 끝난 후 다시 주문을 하러 나와주는 아량을 베풀기도 했다.
알바 후
집에 가려고 늘 가는 버스정류장에 갔는데 누가 소리를 빽-질렀다. 어떤 놈이 술 취해서 이어폰을 끼고 통화하는데 8차선 건너편 정류장에서도 들리겠더라(이스끼야). 이다음이 아주 오늘의 명장면인데, 갑자기 "나 서브웨이 샌드위치 존나 좋아해!!!!!'라며 소리쳤다. 그렇구나 저 남자는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존나 아주 많이 좋아하는 걸 알았다. 그리고 또 알았다. 내가 지금 '존나 열 받았다'는 것을. 나는 슬프게도 화나는 감정을 애써 참고 있었다. 친절한 알바생의 가면 아래에.
서글프게도 이 사건의 핵심은 결국 누군가는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장님은 우리는 결국 장사를 해야 하기에 누군가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사실 100% 동의하지는 못했다. 왜 정작 일하는 직원이 기분이 나쁜데 사과를 해야 하는가,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왜 누군가가 억지를 부리고 어린애마냥 꼬장을 부리고 진상을 피울 때 나는 마음이 한 삼만 피트 되는 현자 인척 다 받아주고 들어주고 이해해야 하는가.
내일 사장님이 전화해서 그 아저씨와 어떤 결론을 지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장님은 아마 또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할 것이다. 나는 전혀 미안함이 없음에도 사장님에게 대신 똥을 치워주심에 감사함과 깊은 미안함을 가지게 된다.
+스핀오프: 을의 슬픔 에피소드 2 '당신의 바짓 자락에 물을 튀겨 죄송합니다.'
올해 약 한 달 정도 다른 사무 알바를 한 적이 있다.
그날은 모두가 외근을 나가고, 나 혼자 점심을 챙겨 먹어야 하는 날이었다. 간단하게 요기로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먹었고, 이제 복귀하려 일어서려는 찰나. 쟁반이 휘청하면서 균형을 잃었다. 그만 컵과 컵 안에 들어있던 물을 쏟고 말았다. 당황스럽고 컵이 떨어지면서 낸 큰 소리에 무안했던 나는 호다닥 컵을 줍고 일어났다. 그때 건너편 저 멀리 앉아 있던 남자는 갑자기 컵을 줍고 가려는 나에게 '저기요!'라고 불렀다. 세상 누가 들어도 '나 지금 겁나 화났거든!' 이란 감정을 듬뿍 담은 말투로 말을(시비를) 걸었다. 그리고서는 왜 자신에게 사과 안 하냐며 물어봤다. 대뜸 물어보긴 했으나 나는 알았다. 컵 안에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이미 내가 다 마셨고, 얼음까지 다 씹어먹었기에 정말 작은 물방울이 흘러나왔다는 것을... 과연 컵 속에 있던 물이 두세 방울 정도밖에 없었는데 그게 갑자기 발사되어서 저만치 떨어진 저 새끼의 바짓 자락에 묻어버렸나,,, 그 정도면 오늘 로또를 사야 할 정도의 희소성인데,,, 싶었는데 이런 생각은 일절 제쳐두고 단 0.1초도 망설이지 않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괜찮으세요? 안 다치셨어요?'란 말이었다.
존나 을로 살던 세월이 무서운 게 아무리 열 받고 당황하고 누군가 갑자기 이렇게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시비를 걸어도 상대방의 안위부터 묻고 수그리는 나 자신이 정말 싫었던 순간이었다. 그 남자도 너무 바로 친절하게 맞받아치는 내 말에 본인도 급 무안한 표정을 짓고서는 괜찮다고 넘어갔다(누가 봐도 괜찮았다)
오늘의 어른스러운 대화
이 브런치 글을 쓰는데도 나는 지금 화가 안 가라앉았다.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타고 스쳐 지나가는 늦은 밤 어두운 풍경을 보며,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을'로 살아야 할까? 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문득 도라에몽은 어떻게 진구의 징징댐을 다 받아주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집에 와서 언니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