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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빵장수 Apr 10. 2019

거짓말 같았던 만우절



4월 1일은 각종 거짓말이 솟구치는 날. 거짓말을 빙자한 각종 드립과 이야기, 기업의 이벤트와 맞닥뜨린다.

항상 그 정도로만 가볍게 생각했던 4월의 첫날이었음에도 올해는 유독 진이 빠지도록 재수가 옴 붙은 날이었다.


일단 아르바이트가 문제였다.


1. 시작은 유자차부터.

4월 1일 따라 오후에 스터디룸에는 손님이 많았다. 그리고 음료 주문도 유독 많게만 느껴졌다. 갑자기 동시에 8잔의 주문이 들어왔다. 모든 음료를 다 만들었다! 하고 나갈 참에 주문내역 중 '아이스 유자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아이스 유자차는 1kg 유자차 유리병을 냉장고에서 꺼내 - 아빠 숟갈로 1 숟갈 반을 떠내고 - 거기에 커피포트로 끓인 물을 넣어 녹이고 - 얼음 4알을 넣어 식혀 - 얼음을 꽉 채운 유리잔에 나간다. )


이 과정에서 유자차를 유리병에서 꺼내어 담고, 냉장고에 다시 넣는 과정에서 이미 7잔의 음료를 만들었던 나의 손은 물이 흥건했다. 그리고 냉장고 앞에서 유자차 1kg 유리병이, 무겁고 한 손으로 못 잡는 그 큼직한 병이 내 눈앞에서 손 밑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가끔 삶에서는 위기 상황 때 슬로모션이 그려지는데, 이때가 그랬다. 유리병이 서서히 떨어지는 중에 내 뇌에서는 이 유리병이 깨지면 어떻게 피하지란 생각 대신, 이게 과연 안 깨지고 바닥에 무사히 떨어질 수 있을까란 초초초 희박한 가능성을 계산 중이었다. 그러나 유리병은 1kg 병 가득히 들어있던 내용물만큼이나 둔탁한 소리를 내며 와장창 깨졌다. 진짜 말도 안 되게 모두 깨져버렸다. 유리 조각 수십, 수백 조각과 유자차 1kg이 온 범벅이 된 채로. 냉장고 앞은 엉망이고, 음료는 나가야 하고. 이 상황에서 카운터에서 전화벨이 울렸나 어떤 손님이 카운터에서 날 불렀나... 그래서 급히 또 뛰어가는데 발바닥이 너무 욱신! 하고 아팠다. 보니 엄지손톱 반만 한 유리조각이 발바닥에 박혀(?) 있었다. 운도 지지리 없지, 얼마 전부터 운동화에서 해방되어 편하게 일한답시고 갖다 놓은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일단 아픔을 견디고 누군가의 급한 전화였는지, 문의였는지를 얼른 끝내고 발을 봤는데 아무리 봐도 유리조각은 분명 뺐는데 너무 아프더라. 이날 또 검은색 새 양말을, 그니까 새삥 양말을 개시한 날이었는데 양말도 찢어지고 양말 속 피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일단 급하니 반창고를 붙였다. 그때 8잔을 시킨 손님 측에서 음료가 왜 이리 안 나오는지 체크하려고 기웃거렸다. 나는 웃는 얼굴로 얼른 가져다 드리겠다며 유자차를 완성하여 서빙했다.(이때 감사하다고 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8개월간의 아르바이트 체감상 절반도 안된다.)


냉장고 앞의 끈적하고 불쾌한 유자차를 쓰레받기와 빗자루, 뜨거운 물, 대걸레를 동원하여 모두 치우고, 이후에도 유자차의 끈적함에 휩싸인 쓰레받기, 빗자루, 대걸레를 또 차례차례 씻어냈다. 그랬는데도 조각이 남아있어 자꾸 밟히길래 또 쓸고 또 쓸었다.


이 상황에서 사장에게 아까 유자차를 통째로 깨서 죄송하다는 사죄의 카톡을 보냈었는데, 사장 측에서 '아....'라는 탄식이 먼저, 그리고 그 후에 나는 괜찮냐는 안부의 카톡이 왔다. 뭔가 놀랍지는 않았던 점이 놀라웠다. 이러한 돌발 상황이 있을 때 깨진 유리잔, 깨진 물품 이런 것들을 먼저 걱정하는 게 늘 말은 안 해도 느껴졌다.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암튼 그렇다.  이윽고 2명의 사장님 중 한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Q. 유자차는 다 치웠는지-A. 치웠다. Q. 안 다쳤나-A. 발에 유리조각 살짝 들어가 피가 났는데 금방 멈췄다고 했다. 그러더니 일하면서 피도 보고 너무 고생이 많다(?)는 약간 사이코패스 같은 걱정을 가벼운 웃음 조의 말투로 전했다. 본인은 이번 주에 결혼을 하니 몇 주 후에 보자며, 그동안 내가 면접에는 어땠고, 그때 뭐 어떤 태도가 좋았고, 지금까지 잘해줬고, 지금 하는 취업도 힘내라며 뜬금없는 본인 위주의 안부전화를 받았다. 끊고도 이건 뭔가 싶었다.


2. 손님에게 일명 '사장 나와' 컴플레인도 받았다. 이건 100% 내 잘못이었다.

반년 넘게 얼굴과 이름을 익힌 단골손님인데, 내가 4월 한 달치 예약 중 4건을 잘못 잡아놓은 것이다. 이것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내 잘못을 시인하고 어떻게 예약을 바꿀 수 있는지 카톡을 보냈는데, 늘 웃는 얼굴로 최고로 친절한 손님 중 한 분이었던 이분의 반응이 굉장히 차가웠다. 자신이 먼저 예약을 신청했음에도 잘못 잡혀있었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시간대에 예약을 한 것에 굉장히 탐탁지 않아했고, 물론 이 부분은 내가 생각해도 화가 충분히 날만했다. 하지만 '사장 번호를 달라'는 반응은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나의 힘을 쭉 다 빼버리는 한마디였다. 사장님께 또 이걸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어떤 부분이 잘못되어 있었는지, 손님이 언짢아하는 부분은 무엇인지 최대한 읽기 쉽게 정리하여 보냈다. 사장님 측에서 나한테 또 상황을 파악하고자 전화가 왔고, 손님과 통화 후에 또 전화가 왔다.


얘기로 전해 듣기에는, 고3 과외를 하는 것이라 금액에 예민한데 시간과 요금이 잘못 잡혀있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아 사장과 통화를 요청했다는 것. 자신도 고등학생 부모인지라 그랬다는 것. 그리고 일하시는 아르바이트생분이 이걸로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 일단 여기까지 듣는데 마지막에 '일하시는 아르바이트분이 이걸로 마음 쓰지 않았으면'에서 턱 막혔다. 늘 이런 컴플레인의 경우 할 말은 다 해놓고 사장과 통화할 때, 본인의 마음이 한참 누그러졌을 때 아르바이트생에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식의 무책임한 사과를 한다.


이후 통화 내용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대부분 위로였다.  이제껏 열심히 일하는 것 다 아는데, 원래 그렇지 않은데 실수인 거 안다, 너무 열심히 해주는 크루인 것을 알고 있다 식의 위로 멘트를 전했다. 이걸 듣는데 또 왜 그렇게 서글픈지 울컥해서 대충 네네 대답하고 끊었다. 그리고 유자차를 아까 잔뜩 씻어냈던 싱크대에, 이번에는 빈 유리잔이 10잔 넘게 쌓여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씻어내려섰다. 물을 틀고 평소처럼 설거지를 하려는데 눈물이 울컥 나왔다. 별로 안 슬펐는데 그냥 눈물이 났다.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나 또 현타가 왔다. 그리고 나는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열심히 할수록 욕먹을거리도 늘어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아르바이트에서 가장 오래 일하셨던 분들의 말로는 먼저 시키기 전까지는 절대 나서지 말라는 조언이 있었다. 그건 사실 내 성격상 맞지 않았는데 하고 넘겼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드디어 갔다. 열심히 한다고 늘 안 시켰던 일도 하고, 더 깨끗하게 하려고, 거의 뭐 열혈 마인드로 일했다. 왜 그랬는지.


3. 노트북 충전기도 누가 전날에 바꿔 들고 갔는지, 생뚱맞은 다른 충전기가 있었다.(이 스터디룸에서는 노트북을 무료로 대여한다) 심지어 전날 바뀐 것인데, 아무도 모른다. 이건 뭐 가벼운 일이었다. 이날 중에서는.



4. 도망갔던 스터디 조장과 재회했다.

때는 작년 하반기, 인적성 스터디를 했었다. 취업 카페에 공지글을 내걸고 인적성 스터디를 만든 장본인인 일명 '방장'이 갑자기 나간다고 했다. 심지어 이때 예약도 잘못해서 내가 아르바이트하고 있던 스터디룸 스케줄을 급히 알아본 후 예약해서 스터디룸도 잡았다. 그러니까 자초지종은, 방장 본인과 그의 친구 이렇게 총 2명은 개인 일정이 바빠 앞으로 스터디 참석이 어렵다고 한다. 뭐 여기까지는 진짜 이해는 안 가지만 붙잡을 수도 없으니 그러려니 했다. 방장이 멋쩍게 '먹튀 인사'를 다 전하고, '이후 스터디는 OO 씨(바로 나야 나)가 잘 이끌어 주실 것 같아요. 맡아서 이끌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말보다는 확실히 방구에 가까운 이 말을 해주었다. 분노와 허무함에 휩싸인 채 나는 이날 밖에 계시던 사장님에게 이상한 스터디를 하고 나왔다, 갑자기 팀장이 되어버렸다고 말했었다.


이후 나는 남겨진 2명의 스터디원들과 함께 새로운 스터디원을 찾아 헤맸고 몇 주간 스터디를 함께 했다..... 그리고 만우절날의 스터디룸에 문제의 그놈, 그 방장이 갑자기 이날 카운터에서 인사를 하더라, 그것도 엄청 반갑게(?). 나는 너무 놀라서 속으로는 '이 스끼 여기 웬일이지' 싶지만, 안부를 묻는, 그리고 예의 없게 나의 취업 진척 상황을 묻는 그의 말에 또 순순히 상황을 공유했다. 나는 묻지도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들었다. 스터디 때려치운 후 어떤 회사에 들어갔다가 연봉이 맘에 안 들어 나왔다는, 그리고 오늘 면접 스터디를 하러 왔다가 내가 갑자기 생각이 딱! 나서 인사하러 왔다는 일장연설을 들었다. 이후에도 전화 문의를 하고 있을 때도 말을 걸기 위해 홀에서 서성거리는 그분의 모습을 봤다. 마지막에 계산하고 나갈 때가 가관이었다. 다 마신 일행들의 음료수 잔을 모아서 카운터 안의 주방에 불쑥 들어와서 갖다 놓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스끼 왜 들어오나 싶었는데, 일행들은 오오 그런 사이냐~들어가도 될 정도냐~권력 남용 아니냐~식의 별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을 던졌다. 속으로 정색하고 '아닌데요'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다음에 또 놀러 오겠다는... 끝까지 말 대신 방구를 뀌고 떠나는 그를 오늘 만났다.



5. 피날레는 청소기.

이 날따라 진짜 밉게도 다들 22시 마감시간에 나가더라.... 암튼 이제 정리도 다 했고, 청소기만 돌리면 끝이다! 했는데 청소기가 안 나온다. 아무리 다시 조립하고, 콘센트를 다시 껴도 바람은커녕 손바닥을 대봐도 입김 수준의 바람 일말도 안 나온다. 대체 어제는 마감 청소를 어떻게 한 건지? 싶었지만, 집에는 가야 하니 빗자루로 일일이 방과 홀을 다 쓸어내고 받았다. 시간이 평소보다 15분은 오래 걸렸다.


이날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나 생각하면 약간 웃기기도 한데, 집에 와서 이런 말도 써놓고 잠들었다(일기 쓰다가 또 울었다흐흑)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일이 생기는 것 같다. 욕먹을거리도, 실수할 가능성도,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터져버리는 가능성도 커지는 것 같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결코 못하려던 게 아닌데 나는 언제나 열심히 친절하게 웃는 얼굴로 일하려고 노력하는데, 사람들의 무심한 불친절에, 무심한 말 한마디에, 작지만 생각 없는 행동 사위 하나로 크게 상처 받고 데인다. 이럴 거면 시키지 않으면 굳이 나서서 고생하지 말라던 베테랑 크루분의 말이 현명할지도. 하지만 또 그렇진 못할 것 같다ㅠㅠㅠㅠㅠ'


 하루가 언제나 아쉽고 아까운데, 올해 화려한 만우절만큼은 얼른 다 지나가버렸으면 했다. 집에 와서 자정 넘어까지 저녁을 같이 먹게 기다려준 가족들 빼고는 모든 것이 엉망징창 와장창이었다. 이건 마치 며칠 전에 일어나자마자 틀었던 TV에서 나한테 C+을 선사한 우리 과 교수님이 나오는 교양 프로그램을 본 것만큼이나 재수가 없었다.


푸념에 가까운 나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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