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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유 Mar 10. 2019

우리 모두는 인생 노잼시기

20대 중반, 불행하지 않고 우울하기만 한 건 특권에 가까웠다.

순식간에 계절이 바뀐 그날부터 역대급 노잼시기가 시작됐다. 머한민국에 90년대생 여자로 태어나 살면서 노잼시기는 몇 달에 한번씩은 반드시 돌아왔으나 이번처럼 줄곧 노잼이었던 적은 취업준비 이후 처음이었다.

그냥 인생이 시시해졌다. 나는, 이 메트로 씨티라는 기계에서 정말 조그마한 나사만도 못한 존재였다. 빠지거나 망가져도 기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혹은 심하게 망가져도 금방 대체될 수 있는 나사보다도 못한 그런 사회적 존재. 그런 철학적인 생각엔 끝도 답도 없었다. 매일 퇴근 후엔 우울의 심연에 빠져 소맥만 홀짝댔다. 혹시나 소셜 미디어 시대에 걸맞는 실수라도 할까봐 핸드폰은 비행기 모드로 돌리고 감정의 저공비행을 반복했다. 그러다 좀 운동이 필요하다 싶으면 방 한켠에 쌓인 맥주캔 소주병을 볼링핀 모양으로 세운 뒤 인형뽑기 기계에 몇만원을 때려박아 겨우 하나 뽑은 이브이 인형으로 볼링을 치곤 했다.

딱히 불행한 건 아니었다. 가끔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의지가 되는 멋진 친구들이 있고, 업무도 사람들도 너무너무 좋은 회사에 다니고 있고, 급여가 엄청 적긴 해도 막 살아가지 못할 정도인 것도 아니고, 자주 빡치게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베프이자 남매같은 애인도 있었다.


그런데 그냥, 너무 재미가 없었다.


학창시절 꿈꿨던 멋진 현대여성 커리어우먼의 삶이 이런 거였나? 나중에 돌이켜보면 지금만큼 좋은 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마음은 그랬다. 불행하진 않은데 시시했다.

대학교 3학년 때는 그 반대였다. 친구들도 나도 모두 바빴고, 돈은 없었고, 일자리도 없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을 지켜줄 애인도 없었다. 그러나 그 해 내내 나는 사명감과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 자신만만함이 넘쳤다. 난 이대로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겠다. 난 짱이다!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그때의 나는 에너지가 넘쳤다. 매일매일 스스로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하루하루를 이겨나갔다.

그러나 그런 자신감은 4년 사이 어디론가 완전히 증발해버렸다. 난 원래 반짝이는 사람이었는데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안주하다 보니 그 빛이 사그라든 걸까, 아니면 나는 원래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 시기에만 우연히 잠깐 반짝 빛났던 것뿐일까.

요즘들어 친구들은 다 내가 부럽다고 했다. 근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불행하지 않고 우울하기만 한 건 특권에 가까웠다. 나름 꿈을 갖고 입사한 소기업에서 586꼰대 상사에게 있는대로 후려치기 당하는 친구, 높은 연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사한 대기업에서 의도치않게 사내 정치에 휘말린 친구, 전공 살려 취직했는데 너무 안 맞아서 매일 화장실만 가면 숨어서 우는 친구, 아저씨들이 자기한테만 진상짓한다는 친구, 불행한 친구들은 너무 많았다. 근데 그렇다고 그들만큼 불행하지 않은 나는 행복했을까?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 아니다. 남이 불행한거에 비해 난 행복해, 하는 뭐 그런 생각도 틀려먹은 것이다. 나도 우울하고 너네도 다 우울한 거지, 누가 더 우울하고 누가 더 불행한지 배틀을 뜰 주제가 아니었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X도 없다. 답은 없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계속 우울하고 불행해야 하는 걸까. 20대 중반을 스쳐가는 열병이길 바라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모두가 우울하고 불행했다. 전염성 열병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그렇게 우울의 심연에 잠겼다.


* 2017년 10월 개인 블로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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