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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자라 Mar 11. 2023

중환자실에 면회 가는 마음

중증장애인 동생이 입원했어요

동생을 보러 가는 날이다. '지금쯤 깨어 있으려나. 눈은 떴을까. 추울 것 같은데.'


생각하다 보니 병원 주차장이다. 면회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던 머릿속이 하얗게 덮였다. 엄마와 나는 나사가 풀려 위태롭게 걷는 로봇처럼 중환자실 앞에 도착했다. 이미 몇 번 면회하러 갔던 엄마에게 주의사항을 들었다.


"장갑 꼭 껴야 하고, 동생이 맨 앞에 있으니까 일찍 들어갔다가 제일 늦게 나올 수 있어. 나가라고 하면 계속 눈치 보다가 마지막에 나와."


평소에는 남에게 눈곱만치의 피해도 주기 싫어하는 엄마가 이런 꼼수를 생각해 냈다니. 중환자실이 주는 무게감은 50년 인생 신조를 우습게 만든다. 아마 엄마 마음은 이러했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너를 더 볼 수 있다면, 장갑 낀 차가운 손으로라도 한 번 더 쓰다듬을 수 있다면.'


면회 시간이 다가오면 명부를 작성한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동생 이름을 적었다. 곧이어 비닐 옷, 장갑, 마스크를 착용하고 동생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렸다.


세차게 뛰는 심장박동을 세고 있으니 어느새 내 차례가 되었다. 명부를 얼른 내밀고 들어섰다. 왼쪽으로 꺾으니 동생이 보였다. 내가 알던 동생인가 싶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은 더욱 창백해져 있고, 가슴팍에는 빨간 두드러기가 잔뜩 올라왔다. 활발히 뒤집던 상체는 미라처럼 가만히 있다. 눈물이 왈칵 나서 혼났다. 절대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장갑 낀 차가운 손으로 어깨를 짚으며 "쭌아" 불렀다. 그 소리에 어떻게 알았는지 고개를 휙 돌려 내 쪽을 본다. 그 눈빛에 또 눈물이 맺혔다. 불쌍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아이가, 몸에 무언가 닿아야만 '나한테 뭘 하는구나' 아는 아이가, 혼자서 무슨 생각으로 버텼을까. 동생은 희귀 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다.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아이다. 눈이 안 보이지만 빛은 느껴지고, 귀도 안 들리지만 대충의 목소리 톤으로 사람을 구분하기는 한다. 병원에 입원한 것은 갖고 있던 희귀병 때문은 아니었다. 원인 모를 폐렴으로 상태가 나빠져 중환자실에 가게 되었다. 동생에게 폐렴이 위험한 이유는 무호흡증 경기를 하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폐렴으로 몸이 나빠지자 경기를 시작했고, 경기가 멈추지 않아 줄 수 있는 최대치 양의 경기 약을 투여했다. 경기는 멎었으나 잠든 상태에서 스스로 호흡하지 못해 중환자실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동생은 말 한마디 못 하지만 눈빛으로 말하는 아이다. 누워 있는 동생이 혼자서 했을 생각을 되짚어보았다.


'엄마는 어디 갔지? 날 두고 간 건가? 이제 나는 혼자인 건가? 누나 목소리는 왜 안 들리지? 왜 귀나 볼을 만지지 않고, 왜 바나나우유도, 미숫가루도, 두유도 안아서 먹여주지 않지? 나는 왜 혼자 여기 있어야 하지?...'


혼자 얼마나 두렵고 낯설고 무서웠을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엄마가 없다는 사실에 익숙해진 듯, 누군가 건드려도 아무 표정이 없는 얼굴을 보니 계속 눈물만 났다. 그래도 시간을 버리면 안 된다. 계속 "쭌아. 쭌아." 말하며 어깨를 쓰다듬었다. 얼마 안 되어 간호사가 엑스레이를 찍는다며 두껍고, 무겁고, 징그럽게 큰 철판을 가져왔다. 다짜고짜 동생의 상체를 일으키고 철판을 대어 찍기 시작했다. 동생이 놀랄까 봐 "쭌아. 놀라지 마. 뭐 찍는대. 차가울 텐데 놀라지 마."라고 말했다. 20살인 나와 기껏해야 5년 차이가 날까 말까 해 보이는 간호사가 울먹이는 나를 훑어보았다. 그의 눈빛이 '엄마도 아니고 뭐 저렇게 울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평소였으면 민망하다고 느꼈을 일인데,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냥 빨리 찍고 갔으면 좋겠다, 그 생각만 했다. 찍는 데 1분이 채 안 걸린 것 같다. 그들은 동생을 맘대로 들었다 놓았다. 인격체보다는 물건을 대하듯 보였다. 동생을 위해 애쓰던 엄마 모습이 겹쳐 그들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났다.


'내 동생이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영영 못 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에 이르니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다. 억울했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키웠고 나는 최선을 다해 엄마를 도왔다. 정말 나는 동생을 챙기는 일에 단 하루도 소홀한 적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동생이 건강하게 내 곁에 오래 있는 것뿐인데, 그게 무너지고 있는 광경을 보니까 정신이 나갔다.


동생이 다시 침대에 눕혀졌다. 얼른 다가가 또 "쭌아, 쭌아." 했다. 나는 울먹이는 소릴 내는지도 모르고 집에서 하던 말을 그대로 뱉었다. "쭌아, 안 추워? 팔이 상글한데? 괜찮아? 누나야 누나. 쭌이 누나 보고 싶었지? 늦게 와서 미안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더듬고 말하며 시간은 갔다. 면회 시간이 끝나간다는 안내에 얼른 휴대폰을 꺼내어 녹음했던 엄마 목소리를 들려줬다.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신기하게도 휙- 고개를 돌리고 집중하던 동생. 내가 말할 때는 시큰둥하더니 큰 반응을 보이는 동생이 그 와중에도 미웠다. 한편으론 엄마 목소리를 알아보는 동생이 이쁘고 기특했다.


동생은 차츰 나아져 며칠 후 일반 병실에 내려왔고, 2주 넘게 병원에 있었지만 다행히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날의 차가운 몸을 우리 가족은 평생 기억한다. 코로나로 면회가 한 번밖에 불가해서 대부분을 엄마가 면회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사람 몸은 차가워지는 걸까? 그러니 이불 밖에 삐져나온 엄마의 발을 덮어주고, 겨울밤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를 꼭 안아주고, 동생이 배앓이할까 봐 여름에도 꼭 담요를 덮어주고, 방금 씻고 나온 오빠 쪽으로 히터 방향을 돌려주도록 인간은 설계되었을까.


인생은 한철 따듯하게 살다 가야 한다는 것을, 동생의 차디찬 몸을 만지고서야 깨달았다.





이 글은 <좋은생각 청년이야기대상>에 공모했다가 떨어진 글이에요. 동생이 코로나 시절 중환자실에 몇 박 며칠 있었던 날들의 기록이기도 하고요. 그때는 정말 예민하고 무서웠는데, 지금은 덤덤히 말할 수 있게 되었네요. 그때 면회를 기다리는데 제 옆에 계신 분이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는 말을 들으셨어요. 저도 그 말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집에 와서 엄청나게 울었지요. 한편으론 다행이고 한편으론 안심할 수 없는, 중환자실의 무게감은 정말... 다른 분들은 겪을 일 없으시길 바랍니다.


이제는 1년 넘게 응급실도 안 가고 잘 지내고 있답니다! 한 2년 동안 병원에 자주 입원했었는데, 엄마랑은 크느라 그랬구나- 생각합니다. 다시 돌아와 주어 너무 고마운 동생이니까요. 아무렴 어떠냐고요.


'건강이 최고'라는 말이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최근에 이슬아 작가님 책 ⟪날씨와 얼굴⟫을 읽으며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 말은 안 하겠습니다. 건강을 1순위로 챙기시는 분들이라면, 꼭 그 바람이 이뤄지시길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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