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이라는 인생의 고비를 넘기고 돌아오니 세상은 삶의 안쪽으로 나를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모라는 역할에 불을 밝히게 된 것이다.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겪는 내 시선이 종종 머무는 곳은 어린아이와 나이 든 부모다.
대중교통을 탈 때면 임산부나 노약자석은 빈 자리여도 그냥 지나치게 된다.
임신을 경험한 여성이라면 임신 중에 만원 지하철에서 두 다리로 온전히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수시로 덜컹이는 버스에서 불룩 나온 배가 출렁일 때마다 얼마나 몸이 크게 내려앉는지 잘 알 것이다. 지하철 노약자석을 보니 문득, 신혼 시절에 목격한 일이 하나 떠올랐다.
한여름 불볕더위가 한창인 8월 무렵이었다. 출근길 지하철 안은 마치 콩나물시루 같았다. 나는 노약자석 안쪽으로 들어와 서서 다음 칸과 이어지는 문가에 자리를 잡았다. 5분 정도 흘렀을까. 날카로운 에어컨 바람에 젊은 여성의 낭랑한 음성이 실려 왔다.
“임산부인데요, 자리 좀 양보해 주시면 안 될까요?”
노약자석에 앉은 50대 중반의 여성은 그 말을 듣고 젊은 여성을 쏘아보았다.
“임산부가 대수야!”
사람들의 시선이 두 여성에게 집중됐다. 나는 나이 많은 여성의 분주한 시선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젊은 임산부를 위아래로 쏘아보다 못해 눈을 희번덕거렸다. 아슬아슬한 눈싸움은 두 정거장 후 50대 여성이 먼저 하차하면서 종료됐다. 젊은 임산부는 그 자리에 앉아 아무 일도 없던 듯 휴대폰으로 본인의 일을 했다.
‘임산부가 되면 노약자석도 구걸해야 하나’라는 억울함이 밀려 왔다.
우리는 편리한 스마트폰 세상을 얻었지만, 사람 사이에 생기는 가벼운 불편을 나눠 해결하려는 마음은 잃어버리게 되었다. 자리를 양보하거나 무거운 짐을 나눠 드는 일은 모두 개인의 결정일 뿐 미덕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이런 소소한 일은 ‘강요된 배려’라고 일축되고, 없애야 하는 낡은 관습으로 가볍게 정리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비대면 일상도 불필요한 움직임을 줄이는 편의를 제공한 반면 대면에 대한 간절함은 더욱 높인 듯 보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이유는 사람 간의 관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배려와 인간애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배려를 강요하지도, 강요받지도 않는 세상이지만 배려의 다른 이름인 ‘친절’이 주는 삶의 여유에 대해 한 번쯤 깊게 생각해 보고 싶다.
*본 글은 <엄마이지만 나로 살기로 했습니다(21세기북스)>에서 발췌되었습니다.
2020년 12월 중순 이후 서점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