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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몰입 2022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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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화영 Mar 25. 2022

라이드 인생

‘나는 언제든 이 길 위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스쳤다.

어린 시절 종종 운전하는 꿈을 꿨다. 너무 생생해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를 정도로 자는 내내 심장이 쿵쾅댔다. 정말 내가 차 안에 타고 있는 것이 맞는지 눈꺼풀을 수차례 깜박인다. 그러고는 가속페달을 능숙하게 밟고 조절한다. 책에서만 읽고 곁눈질로 살피던 운전자의 속도를 맛본다. 언젠가 내가 운전을 하게 된다면 ‘꼭 이럴 것만 같아’라는 예시처럼 퍼지는 비현실의 신기루.     


두 번째 쌍둥이 출산을 한 후, 이제는 운전면허를 따야 할 때가 왔다는 직감이 들었다. 묘한 책임이 감돌았다. 꿈속에서의 무수한 시운전 덕분이었을까. 비교적 순조로운 과정을 거쳐 면허증을 손에 쥐게 됐다. 퇴근한 남편에게 잠들기 직전 세 아이를 부탁하고는 매일 저녁, 30분씩 집 근처를 운전하며 배회했다. 낮 동안 묶였던 발이 풀린 기분이랄까. 매끈한 가죽의 핸들을 움켜쥐는 촉감이 좋았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로든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상기된 일탈이 반가웠다. 


튼튼한 네 바퀴가 발을 대신하는 감사와 온전한 내 공기로 부유하는 차 안의 공기. 이 안에 숨 쉬는 생명체가 오롯이 나 하나임에 야릇한 희열이 번진다. 창문을 내려 습한 여름을 차에 태운다. 그러고는 달리는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선풍기 앞으로 얼굴을 바짝 갖다 댄 아이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마치 열기가 들어올세라 차단되는 바람에 금새 차가워진 뺨에 '바로 이거야!'라고 외치면서. 여기에 오늘의 무드를 반영한 음악 하나를 틀면 바짝 마른 뇌에 신선한 피가 흐르듯 머리가 상쾌해진다. 가수 적재의 ‘별 보러 가자’ 기타 반주가 흐른다. 순식간에 내 차는 길거리 이동 뮤직박스가 된다.     


스무 살 무렵 꿈꾸던 드림카는 마흔을 넘기면서 이루어졌다. 신혼 초, ‘차를 산다면 저 차가 좋겠어’라고 사탕 가게에서 캔디를 고르듯 길 위에 멈춰 선 차를 점 찍었다. 무심코 던졌던 말은 9년 뒤 단종된 2011년도 모델을 찾아 ‘마이카’라는 인연으로 우리 집에 도착했다. 신기루가 현실로 환생한 날이었다. 만물에는 인연이 존재한다더니. 추억처럼 곱씹던 모델을 남편이 찾아올 줄이야. 그러나 잊고 지낸 기억의 비좁은 틈 사이로 얕게 비치는 운명은 단숨에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의 빛이 된다. 차에 시동이 걸리면 계기판에 불이 켜지듯 무채색이던 삶에 하나, 둘 빛이 들기 시작한다.      


빛을 감상하던 것도 잠시, 곧 나는 세 아이의 공식적인 운전기사가 됐다. ‘출발합니다’로 시작해 ‘도착했습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파킹 브레이크를 힘차게 밀고 당긴다. 휴대폰으로 넘겨 본 지난 1년은 장롱면허의 먼지가 무색하리만큼 라이드에 전투적이었다. 멀어진 유치원에 큰 아이 졸업을 위해 바지런히 셋을 태웠다. 이미 시작된 영어학원을 놓지 못해 쌍둥이 하원이 늦어짐에도 불구하고 8차선 도로를 질주했다. 늦가을에 시작된 수학학원은 더 이상 집에서 홈스쿨링이 불가능해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기다리는 동안 쉼을 택했다. 제법 주관이 뚜렷한 쌍둥이의 본격적인 문화센터 나들이가 시작됐고 주5일 라이드는 자연스럽게 주6일로 업그레이드 됐다. 시간도 하루 평균 왕복 두 시간으로 매주 길에서 순수하게 운전으로만 12시간 이상을 내내 달리는 셈이다. 몰아서 운전을 한다면 반나절 내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만족을 담보로 체력의 상당 부분을 라이드에 기꺼이 소모한다.      

    

첫째의 학원 수업 종료시간과 쌍둥이의 너무 늦지 않은 하원을 고려하는 라이드 전쟁이 몇 달을 오갔다. 닿을 듯 말 듯 제각각인 몸집을 드러내는 빼곡한 차량 사이에서 ‘나는 언제든 이 길 위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스쳤다. ‘사고’란 우연이 실어 나르는 운명의 파도다.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흐름이 잡을 수 없는 물길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언제든 사고 차량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은 반대편 사고 현장을 스치듯 빠져나가면서 순간의 위치를 확인시킨다. 언제쯤이면 이 길위 라이드를 멈출 수 있을까. 어디에, 언제 만족할 것인가.   


모든 것에 정성을 쏟으면 에너지가 빠지듯, 매일 쏟아야 할 스케줄에서 주요한 일정에 대한 효용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퇴근 후 여유로운 저녁의 삶을 갈망하듯 시간을 관리하는 것은 내 하루의 흐름을 세팅하는 일이다. 이것은 버릇이 됐고 육아 원칙이자 삶의 지향점이 됐다. 최소한으로 줄인 일정이라고 합리화하면서 라이드에 임한다. 다만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로 주위를 무수히 살펴야 하는 바쁜 안구 운동과 신경전을 감당한다.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증상을 마주하면서 홈트를 빠뜨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도 스케줄에 얹는다.      


눈 예보를 확인하면서 제발 눈이 쌓이기 전에 무사히 도착하자! 오늘도 차에 시동버튼을 누르며 마음을 다잡는다. 너무 호들갑스럽지도, 들뜨지도, 그러나 긴장을 채운 배터리를 머리와 심장 사이에 갈아 끼운 뒤 운전석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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