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잔금을 치르는 날엔 적막한 기운이 감돈다. 큰 돈이 오가기 때문이다. 임대인은 반환해야 하고 기존 임차인은 받아야 한다. 법적 효력이 발생하는 계약서에 서명하는 만큼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릴 필요가 있다. 애초 계약금을 지급했고 어느 정도 완성된 계약서를 작성한 상태라 별다른 변수가 나타나지 않으면 무난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최근 금리 인상으로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자 전세 잔금일에 임대인과 예비 임차인의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
ㅣ일반적인 상황에선 다투지 않는다ㅣ
잔금일까지 왔다는 것은 임대인과 예비 임차인 간의 계약 효력이 발생하고 있다는 뜻이다. 통상 전체 보증금의 일부를 계약금으로 지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부동산 전문 변호사는 전화 통화에서 “계약금을 낼 때 계약서에 서명하기 때문에 법적 효력이 발생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계약금을 입금한 뒤 계약을 파기한 측에서 위약금을 문다. 조금씩 다르지만 임대인은 송금액의 두 배 보상, 임차인은 송금액을 포기하는 조건 등이 따른다. 때문에 잔금을 치를 땐 예정 시간보다 조금씩 지연될 순 있지만, 양 측이 다투지는 않는다.
ㅣ부동산 시장 침체로 발생하는 갈등ㅣ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달라진다는 옛말처럼 상황에 따라 심리가 변한다. 전세계적인 금리 인상 여파로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자 예비 임차인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잔금을 치를 때 임대인에게 요구하는 조건이 생기고 있다. 임대인은 들어줄 수 없다며 팽팽하게 맞서 갈등이 발생하고 시간이 지연된다.
한 부동산 중개인은 “일반적으로 잔금을 내는 시간이 정해지는데 지연되는 이유는 예비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갑작스러운 수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라며 “부동산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고 전세 거래량이 줄다 보니 생기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계약금을 치르기 전에 이미 집을 봤는데 잔금을 입금하기 전에 다시 한번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ㅣ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임대인ㅣ
계약서에 적힌 대로 이행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요즘 부동산 시장이 너무 얼어붙었기 때문에 임대인들이 무리한 조건처럼 보이더라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한 부동산 중개인은 “요즘 시장이 너무 침체됐기 때문에 갑자기 요구사항을 들어달라는 예비 임차인이 생기고 있다”며 “시장 하락이 언제 멈출지 알 수 없어 선뜻 전세 매물을 계약하는 사례가 흔하지 않다”고 말했다. 세입자 구하기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잔금일에 과한 조건을 내거는 예비 임차인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ㅣ난감해지는 기존 세입자&부동산ㅣ
기존 세입자와 부동산 중개인은 난감해진다. 이삿짐센터는 물론 이사 갈 곳의 기존 세입자에게 대략 몇 시쯤 잔금을 치를 수 있다고 언질 했을 것이기 때문에 볼멘소리를 듣게 된다. 기존 세입자가 보증금을 받아 잔금을 완납하고 이사를 진행하려면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비 세입자가 임대인에게 잔금 지급→입금받은 임대인이 기존 세입자에게 보증금 반환→기존 세입자가 이사 갈 집의 임대인에게 입금→그 임대인이 그 집의 기존 세입자에게 잔금 반환→이삿짐 반입 등 꽤 복잡하게 진행된다.
기존 세입자는 여기저기서 싫은 소리를 듣는다. 특히 이삿짐센터로부터 시간이 지연된다며 추가 금액을 요구받을 수 있는 등 스트레스가 가중된다. 부동산 중개인 역시 이런 과정을 중재해야 하기 때문에 당황스러워진다. 한 부동산 중개인은 “잔금 치르는 날에 집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은 어딘가 트집을 잡겠다는 의미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