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영민 Nov 11. 2023

대상포진의 추억

  요양보호사교육원에서 야간 강의를 하게 되었다. 퇴근하자마자 아이들 저녁 챙기고, 학원으로 달려가 4시간 동안 열변을 토하고 돌아오면 밤 11시. 서둘러 씻고 설거지, 빨래 개기, 집정리를 하고 나면 자정이 훌쩍 지나있다. 피곤할 때마다 그렇듯, 입 안이 다 헐고, 입가와 이마에 뾰루지 몇 개가 올라왔다.


  야간 강의가 없는 날에도 바쁘긴 마찬가지다. 아이 둘을 학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와야 한다. 일찍 자고 싶지만, 손도 까딱하기 싫지만. 소파 위에 개야 할 빨래가 산더미고, 한창 크는 애들이 우유와 물을 먹어대는 통에 끼니마다 설거지를 해 대도 싱크대에 쌓인 컵만 몇 개인지 쳐다보기도 싫다.


  물 한 모금으로 까칠한 입 안을 적시고, 버석거리는 눈꺼풀을 억지로 추켜올리며 차키를 집어 들고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오른 손등이 간지럽다. 왼 엄지로 문지르니 오돌토돌한 물집이 십 수개 만져졌다.


  '어머, 이게 뭐야? 요즘 빈대가 문제라던데, 서얼마,그건가?'

  아이를 데려오고 나서 화장대에 앉아 손등을 들여다봤다. 물린 자국은 아닌 듯싶고, 알레르기 같기도 하다. 알레르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바르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물집은 그대로다. 조금 붉어진 것 같기도 하다. 갑자기 춥고 건조해져서 뭐가 올라온 것인가 싶어, 보습제를 듬뿍 바르고 출근했다. 그날 저녁, 다음 날 강의를 준비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 손등에 난 건 바로, '대상포진!'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이 놈을 만난 적이 있다. 9살 때부터 내 몸에 숨어 지내던 수두 바이러스가 오른쪽 등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쉬는 날은 토요일 뿐이었다. 오전 학교수업을 마치고, 오후에 집에 와서 멍하니 TV를 보다가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반 친구들과 모의고사 문제지를 풀었고, 평일에는 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했다. 집에 와서는 12시까지 EBS TV 강의를 보면서 문제집을 풀었다.


  중학교 때 철없이 놀아 재낀 것을 뒤늦게 후회하며, 그렇게나마 학업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심신을 달래는 유일한 루틴은, 야간자율학습 후 버스정류장 앞 떡볶이집에서 친구들과 야식을 먹고 오락실에서 펌프 한 판 뛰는 것이었다. 토요일 오후에 쉬는 것으로 쌓인 피로가 충분히 풀릴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면역력이 떨어진 틈을 타, 척추부위 바로 옆, 오른쪽 등에 500원 동전만 한 병변이 생겼다. 참을 수 없이 가려웠다. 수업시간에 참지 못하고 의자 등받이에 비벼 긁어대야 할 만큼. 동생에게 가려운 곳을 봐 달라고 하니, 좁쌀만 한 물집이 빼곡히 들어차서 너무 징그럽단다.


  민간요법에 능하시고 뇌호흡, 단전호흡을 설파하셨던, 자칭 '우리 집 주치의' 아버지가 내 병증을 그냥 지나치실리 없었다. 펜침으로 그 작은 물집을 하나하나 다 찔러 터뜨리시고는 부항을 뜨셨다.


  그게 대상포진이었다는 것, 물집 안에 수두 바이러스가 들어차 있다는 것, 물집을 터뜨리면 주변으로 퍼지거나 세균에 감염되어 덧날 수 있다는 걸 아셨다면, 그리하지 않으셨을 텐데!


  하루 이틀 지나자, 가려움은 어느새 긴 바늘로 쑤셔대는 것 같은 통증이 되었다. 아프더라도 걸을 수만 있으면 학교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가훈을 거스르고, 선생님께 '외출'로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등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다고.


  “이거, 오른쪽에만 생겼죠? 대상포진이에요.”

  “대상, 포진이요?”

  "네, 대상포진. 한쪽 신경 지나가는 곳에 생겨요. 그런데 학생, 물집을 터뜨린 거예요?"

  의사 선생님은 찡그리셨고, 나는 민망해서 배시시 웃었다. 면역력이 떨어지는 노년기에 많이 걸린다는, 대상포진에 걸린 고등학생. 그게 나였다.




  "글쎄, 저희 아버지가 대상포진 부위에 부항을 뜨셨답니다. 하하."

  야간 강의에서 대상포진 설명에 내 이야기를 곁들였더니, 아버지뻘 되는 수강생 어르신들은 '딸내미 낫게 해 주려고 부항을 뜬 것 아니겠냐'며 같이 웃으셨다.


  "수두 걸리셨던 분들 몸속에 바이러스가 잠자고 있을 거예요. 우리 몸에 들어온 바이러스를 약으로 완전히 죽이지는 못 해요. 숫자가 늘어나는 걸 막는 정도의 치료만 가능해요. 그 대신 우리 몸의 면역력을 높이는 방법으로 억제할 수는 있지요. 잘 쉬시고 잘 드시고요, 예방접종하시는 것도 도움이 돼요."


  고등학생 딸내미가 어서 나으라고, 그리고 먼 훗날 강의도 재미나게 하라고, 우리 아버지는 그날 사혈과 부항을 하셨나 보다.


*참고 : 서울대학교병원 N의학정보 - 대상포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