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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Nov 18. 2023

털이 많아서 슬픈

수북이 자라난 수치심과 원망

...... 털이 미웠다. 제모를 위해 사용해보지 않은 제품이 없었다. 붙였다가 한 번에 뗄 수 있는 다소 고전적인 청테이프, 뽑고 나서 털이 자라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린다는 장점이 있는 핀셋, 간단하지만 매일 사용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는 일회용 면도기, 냄새가 묘하지만 힘들이지 않고 털을 제거할 수 있는 제모크림까지.
- 박선영, 유지영, 『말하는 몸 1』, 문학동네, 2021, p. 59.  


    여기에 끈적이는 액체를 피부에 바르고 거친 천을 붙였다 빠르게 떼어, 넓은 면적의 털을 뽑는 '슈가 왁싱', 병원비가 비싸긴 해도 모근을 태워 없앨 수 있는 레이저 제모까지 추가하면, 나의 제모법 목록이 완성된다. 나도 그녀들처럼, 털이 미웠다.


  털이 나는 건 고마운 일이어야 했다. 조물주가 사람 진피층에 씨앗을 뿌려 털을 자라게 한 것은, 아마도 피부를 마찰과 손상에서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두부에 자주 비유될 만큼 연약하지만, 사람이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기관인 '뇌'만 봐도 그렇다. 물리적인 충격을 완충시켜 줄 뇌척수액, 단단한 머리뼈, 두꺼운 피부, 그걸로도 부족해 적어도 7~8만 개의 머리카락으로 보호받고 있다.


  코나 귀 안에도 털이 나 있다. 이곳의 털은 외부로부터 이물질이 들어와 호흡기 내부나 고막에 침입하는 것을 막아주고, 내부의 습기를 적당히 유지해 준다. 코나 귀 안의 털이 과도하게 자라나 바깥으로 삐져나오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이들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나 불필요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털은 나를 당혹하게 했다. TV나 잡지에서 칭송받는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에는 항상 하얗고 매끈한 팔과 다리가 등장했다. 인중에 난 잔털, 지저분하게 퍼져 자라난 눈썹은 그 이미지에 입장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각인된 매끈한 이미지는, 내 몸에 무수히 자라난 털을 남몰래 뽑고 밀어버리는, 끝없는 투쟁에 불을 댕겼다.


  겨드랑이 제모는 옷차림이 가벼워지는 계절마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숙제다. 소매가 넓은 티셔츠나 민소매 블라우스를 입을 때 곱슬곱슬한 털 가닥을 공개하고 싶지 않다. 겨드랑이를 면도한 후에는, 갑자기 매끈해진 피부가 그대로 맞닿으면서 땀으로 미끌거리는 것을 느낀다. 털이 있어서 쾌적했던 내 겨드랑이는, 하루아침에 민둥한 얼굴로 울상이 된다.


  어느 겨울, 헬스장 샤워실에서 친구에게 겨드랑이 털을 들켰다.

  "너, 제모 안 했어?"

  "응, 겨울이잖아. 이럴 때라도 좀 쉬어야지."

  "남편이 뭐라고 안 해?"

  "......"

  음, 그런 생각 안 해 봤는데? 남편의 겨드랑이 털은, 내 것보다 훨씬 더 많고 억센데, 나는 뭐라 안 하거든. 십수 년 같이 살았으니, 남편도 내 겨드랑이 털은 눈 감아 주는 게 아닐까. 참, 레이저 제모를 해서 그나마 이 정도야.




  요즘 들어 느낀 거지만 털이 많이 빠지고 얇아졌는지 예전만큼 눈에 띄지 않는다. 반지 밑에 눌려있던 손가락 털도, 그렇게 뽑아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타킹을 뚫고 나오던 종아리 털도, 에어컨 바람에 닭살 돋을 때 팔에서 곧추서던 털도. 내가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때를 밀어주던 친구가 '신생아 등 같이 털이 참, 많다.’며 감탄했던 등에서도, 아마 그럴 것이다.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 있어 아름다운 털은 숱이 적은 것이 아니라 불균등하게 분포된 것을 말한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이 땅에 태어나 자란 나는, 머리카락과 속눈썹은 많고 길수록 좋고, 그 외 대부분의 털은 없어야 좋다고 믿게 되었다. 아름다워지기 위해 응당, 뽑고 떼고 밀고 지져야 했다.




  "머리 좀 단정하게 묶을 수 없니?"

  간호부장님이 내 잔머리를 지적했다. 엄마를 닮아 털이 넘치다 보니, 뒤통수 쪽 머리카락이 뒷목 아래까지 났다. 모근이 없어도 될 만한, 볼록하게 만져지는 마지막 경추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머리카락이 자랐다.


  제일 짜증 났던 것은 이 부분의 털은 일정한 길이까지 자라면 더 이상 길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차라리 길었더라면 다른 머리카락과 함께 묶어버렸을 텐데, 그러면 저따위 지적질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똑딱 핀, 실핀, 그 어떤 핀을 꽂아도, 스프레이를 왕창 뿌리거나 강력한 왁스를 듬뿍 발라도, 목 뒤 잔털은 삼국지 장비의 턱수염처럼 호탕하게 행동했다.


  목 뒤 잔털은, 나에게 붙은 애증의 '상표'이자 단정한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오점이었다. 자칭 타칭 '털미녀'였던 엄마의 유전자를 부정하고 미워했다. 이 죽일 놈의 잔털 때문에, 우리 엄마는 천국에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계셨다.


  3년 전, 문득 생각했다. 레이저로 겨드랑이 모근도 다 태워 없애는 마당에, 이 놈의 잔털과도 영원히 이별할 수 있는 거 아닐까. 10회에 걸쳐 화끈거리는 시술을 받고 모근이 고름주머니로 변해 소멸하면서, 비로소 해방되었다. 간호사로서 단정하지 못해서 직업윤리를 저버린 것이나 되는 양 취급받던 울분으로부터, 꼬불꼬불 나풀나풀 철없이 굴던 말썽쟁이 때문에 치솟던 짜증과, 가끔은 하늘나라 엄마에게까지 미치던 원망으로부터.




덧) 제모에 대한 신문기사들을 살펴보다가, 건강 기사를 가장한 광고글에 화가 치밀었어요. 털이 많으면 습기가 차고 미생물이 번식해 좋지 않다고, 모낭충이 자랄 수도 있다고, 그러니 제모를 하면 위생과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과연 그럴까요?


  오히려 털을 강제로 뽑으면, 손상된 피부에 세균이 감염될 수 있다는 걸, 책에서도 배웠고 자주 경험합니다. 한 번은 다리털을 뽑은 후 그 부위가 덧나서 봉와직염으로 입원한 환자를 간호했었어요. 그분은 근육까지 염증이 퍼지지 않도록 피부층을 몽땅 긁어내고 소독하고 항생치료를 받아야 했답니다.


  코털은 함부로 뽑지 마세요. 코 안에는 세균이 아주 많은데, 코털을 뽑아 점막에 손상이 생기면 염증이 아주 잘 생긴답니다. 삐져나온 코털은 조심스레 다듬어 주세요.



*참고 : 일요신문 기사(2015.5.13.), 헬스조선 기사(2021.4.2.)

**사진: Unsplash (Linh 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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